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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17. 2022

삼도천에는 낭만이 없다

올해로 다섯 살이 된 둘째가 말했다.


"아빠."


"응?"


"난 아빠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자기 아버지가 죽음을 몰고 다닌다는 걸 직감적으로 아는 걸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어쩐지 뜨끔했다. 저 나이는 아니었지만 나도 한 여덟 살 즈음해서 엄마한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하고 물었더랬다. 지금의 나보다도 나이가 어렸던 엄마는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나는 빛없는 터널 같은 공포를 느꼈다. 엄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입을 떼었다.


"아주 나중에 죽을게."


 "......"


그냥 엄마처럼 가만히 있을 걸.




인형처럼 가는 몸이 루카스(자동식 흉부 압박 시스템)의 실리콘 빨판에 붙어 위아래로 요동쳤다. 두둑 뚝 하며 가슴뼈가 몇 개 부러졌다. 흘러나온 혈액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쇼크가 온 걸로 보아 내부 출혈이 상당히 진행된 것 같았다.


"이니셜(최초 리듬) 뭐였어?"


"v-fib이라서 벌써 샥(shock) 두 번 때렸어요. 지금은 pea(심장은 뛰지 않고 전기 신호만 감지되는 상태)에요."


주름 하나 없이 맑은 피부는 여자가 겨우 이십 대 중반에도 이르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인적 드문 새벽, 남자와 여자는 밤새 들이부은 술기운과 함께 오토바이에 올랐다. 여자가 남자의 허리를 감고 , 남자는 들뜬 기분으로 액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새벽별이 남아있었고, 맞닿은 서로의 체취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허파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거리였던 교차로가 회전식 로터리로 변하고, 여자 몫의 헬멧이 없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남자가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남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할 정도로 애 티를 못 벗은 얼굴이었다. 이 불행한 영혼은 잠시 뒤면 자신의 준비성 부족으로 연인이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이었다. 아마도 평생을 자책할 것이다. 여자의 가족이 평생 남자를 저주할지도 모른다. '오, 제발 이제 착하게 살겠습니다. 술도 안 먹겠습니다. 오토바이는 혼자만 타겠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겠습니다.' 하고 맘 속으로 기도를 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사실 이쪽이 현실성이 있다). 어쨌거나 10여분에 걸친 구급대의 전문소생술과 대학 병원 이송 후의 체외순환 심폐소생술마저 여자의 죽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늘 그렇듯 확실시된 죽음에는 덧댈 만한 수식어가 없다. 죽음 이전에 얼마나 좋은 삶을 살았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건, 얼마나 사랑을 했건 죽음 자체는 그 사실들에 대하여 미소 짓거나 이를 갈지 않는다. 나의 삶이 나의 가족과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좋거나 혹은 나쁜 의미가 될지언정, 죽음 이후의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없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죽음이 의미가 될 수 있다고 하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죽음이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이젠 추억이 된 과거의 삶이 의미를 갖는 것뿐이다.


 죽음은 그저 죽음이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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