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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04. 2023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군인마트에서 세탁 세제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다. 국가유공자인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덕에 손주와 며느리, 애들까지도 덕을 본다. 간식도 싸고, 가공육류도 싸고, 화장품도 싸고, 무엇보다도 술이 싸다. 500밀리 연태고량주를 만원에 파는데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오후 다섯 시에 유치원 다니는 둘째의 담임교사와 상담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적기 시작한 네 시 반부터 약 삼십 분의 시간이 남아있는 셈이다. 지금은 유치원 근처 공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엄지로만 글을 적는 중이다. 나 홀로 백일장이다. 시간이 챙강챙강 간다. 마음은 급한데 두꺼운 손가락이 숱하게 오타를 낸다. 환장하겠다.


 사진처럼 의자가 쪼르르 놓였다. 밥상머리 의자도 있고, 화장대 의자도 있고, 작업용으로 쓰는 발판 겸 의자도 보인다. 의자들은 앞의 널찍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웃자란 물풀과 호수 아래 가라앉아 대가리만 내어 놓은 나무와 듬성듬성 갈대가 자란 조막만 한 섬들이 보인다. 오리가 물 위를 낮게 날며 깩깩대고 그 너머로 4차선 도로를 잇는 다리 위를 차들이 왕왕 소릴 내며 지난다.


 호숫가 산책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마도 나처럼 일없는 사람들이다. 뒷짐 지고 걷는 할머니, 날이 다 풀렸는데 패딩 차림을 한 아주머니, 쫄쫄이 입고 뛰는 멋쟁이와 예쁜이 커플, 쪼그려 앉아 줄담배 태우는 영감님. 여전히 코로나의 지배 아래 있는 듯 94 마스크에 등산복을 꼭꼭 껴입은 중년 부부도 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30분이 훌렁이다. 방구석에 줄곧 앉아있는 나이가 되면 그래서 세월이 빠르단 얘기를 하는가 보다. 이건 의자가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풍경에 던져 넣은 못돼 먹은 화가다. 장난꾸러기 조물주의 분신이다. 부리나케 의자에서 일어난다. 중요한 상담도 잊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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