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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05. 2023

월리의 양말 색을 아십니까

 나 어렸을 때 굉장히 유행했던 그림책 시리즈가 있다. 어린 눈에 너무 환상적이어서 유행했다고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자라 자라 할 때까지 그림책을 들여다보다가 지금 글 쓰듯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또 들여다봤다. 월리를 찾아라 라는 책이었다. 페이지마다 다양한 주제의 풍경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그 속에 숨은 월리를 찾아내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월리 외에도 그의 옷을 따라 입는 빌런이라던가, 여자친구라던가, 마법사라던가, 손톱 크기의 온갖 인간군상들이 책 속 세상에 시끌시끌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안에서 월리를 찾아내는 건 상당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인물과 배경 묘사 등에 한 번씩 눈길을 주다 보면 꼭꼭 숨은 월리는 어느새 잊을 만큼 소소한 재미가 쏠쏠하다. 시골집 다락방을 잘 뒤져보면 어디선가 튀어나올 텐데 애들 보여준다는 핑계로 6권짜리 합본판을 또 샀다. 직쏘 퍼즐도 들어있다. 내가 물욕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영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추억을 사는 일이다. 손때 묻어서 반질반질 빛나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물건이라면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연다. 돈 못 모으는 핑계도 여럿이다.


 월리는 여행자다. 세계여행은 기본이고 시간여행, 환상여행, 영화 속 여행까지 총망라한다. 세상에 그가 밟지 않은 땅은 물론이요 하늘도 없을 것 같다. 월리는  구불하게 떡진 머리를 사철 내내 털모자로 감싸고 있다. 주변머리 제외 모자 안쪽은 대머리다. 모자 벗을 때까지 그렇게 주장할 생각이다. 빨간 줄무늬 티셔츠와 청바지, 앞코가 빵처럼 둥근 신발도 한결같다. 스티브잡스처럼 옷장 가득 그 옷만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가지엔 스노클용 물안경과 작은 가방, 사진기가 줄줄이 매달려 있고 앞으로 목이 꺾이는 걸 염려한 듯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가다용 대삽을 꽂은 덩치 큰 배낭을 메고 있다. 허리춤엔 여행 중에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 머그컵과 자기 머리만 한 주전자를 통째로 달고 있다. 대한민국 군인의 군장과 견줘도 모자람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어쩌면 월리는 아득한 미래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불 뿜는 용암지대를 색색의 용이 날아도, 바이킹이 코 앞에서 창칼을 부딪혀도, 덜 익고 다 익고 익다 못해 썩은 거대 토마토 옷을 입은 채 온몸을 토마토 색으로 칠한 괴인들이 장총에 토마토를 장전하고 쏘아대도 늘 흐뭇하게 웃는 표정이다. 월리의 거대한 여행짐은 아마도 미래에서 개발한 특수소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깃털처럼 가볍고, 그의 옷과 안경과 신발은 완벽한 방탄 및 방검, 방수 기능을 탑재한 게 분명하다. 책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여행은 불가능하다. 아니면 월리라는 인물 자체가 초인이던가. 아니면 월리의 세상 속 신이라던가.


 시리즈 1권의 난이도는 수월한 편인데,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말한 차림새를 하나 가리지 않고 여행을 다니기 때문이다. 워낙 어수선한 행색이라 한두 번 책을 본 경험이 있다면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바로 저기 있네 할 정도다. 하지만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점차 찾는 게 어려워진다. 눈에 띄는 짐가방과 잡동사니는 아마 호텔 프런트에 맡겨둔 듯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닌다. 그나마 옷 입는 스타일이 고집스러우니 망정이니 그도 아니라면  찾는 시간이 배는 걸릴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는 사람들이나 건물 사이사이에 머리통만 내놓기에 이르는데 이쯤 되면 한 번 해보자는 거다. 독자와 싸워보자는 작가의 심정이 오롯이 느껴진다. 절정은 3권 환상여행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월리의 나라에서 진퉁 월리를 찾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걸 30년 전에도 찾지 못했다. 어른의 자존심으로 이번에는 한 번 찾아보기로 했다.


 그림엔 얼룩말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한 천 명은 될 법한 월리가 빼곡하다. 일단 진퉁 월리는 대머리기 때문에 모자를 벗은 놈들은 제껴둔다. 표정에서 평정을 잃은 놈들도 제외다. 월리는 늘 웃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힌트가 그림의 좌측 위에 적혀 있는데, 진짜 월리는 신발을 한 짝 잃어버렸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양말만 신었거나 맨발인 놈이 진짜인 것이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두 시간은 신발 잃은 칠푼이 월리를 찾으려 눈이 빠져라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은 아빠랑 보드게임 하며 놀자고 내내 조르다가 떨어져 나갔다. 구부정하게 앉아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꼴을 보고 와이프가 뭐라 한 것 같지만, 나는 한 번 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지는 남자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 왁 하고 눈에 띄었다. 가증스럽게도 제 옷과 똑같은 빨간 줄무늬 양말을 신고 예의 그 흐뭇한 미소로 위엄을 잃지 않은 진퉁 월리가 오만 짝퉁 월리 속에서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친구였다면 정말 등짝을 백 번쯤 갈겼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찾았으니 다행이었다. 못 찾았다면 이튿날 패배감에 몸부릴 칠 내가 빤히 보였다. 막상 집중력이 떨어지자 30년 만에 만난 오랜 친구를 대하듯 마음이 편안하고 뭉클했다. 줄무늬 양말을 보고 대번에 꽃 같은 자식이라고 소리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월리는 내가 초등학교 내내 놀이터에서 놀고, 중고등학교 대학교 내내 공부하고 술 마시고, 일하다가 결혼해서 애가 둘이나 생기는 동안 홀로 여행만 다녔다.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외로워 보였다.

 양말 신은 월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려다 말았다. 책을 덮으면 월리는 또 기억 속에서 까맣게 잊혀 언젠가 처음 같은 심정으로 찾아 헤매야 할 터였다. 바로 그게 월리를 찾는 재미고 의미이지 싶었다. 내 삶에도 신이든 누구든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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