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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09. 2023

버리고 싶은 아내

 오늘은 뒷담을 좀 해야겠다. 평일 낮에 있었던 일이다. 첫째 방과 후 운동 시킨다고 체육관에 데려다 주고 한 시간 정도 짬이 났다. 피곤한 데다 소슬비가 설설 내려 기분도 우중중 했다. 아내가 굳이 앉아 쉬고 싶은 내 손을 잡아끌며 산책을 가자고 했다.

 추운데.

 빨리 가요.

 피곤한데.

 다녀와서 쉬어.

 밖으로 나서자 군소리 못하게 해까지 떴다. 젖은 구름을 비집고 해가 고개를 넣었다 뺐다 하는 폼이 노새 마냥 끌려가는 날 보며 슬쩍슬쩍 비웃는 것 같았다.


 아내는 휘적휘적 팔을 흔들며 홀로 거닐었다. 그러다 슬며시 다가와서 팔짱을 바짝 끼고 어딘가로 걸음을 종용했다. 세일하는 동네 옷가게였다. 나는 내 옷 사는 것만큼 돈 아까운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애들이야 쑥쑥 자라니까 거기에 맞춰 옷을 사 입혀야 하는 게 당연하고, 아내는 여자니까 비싼 옷은 아니더라도 해진 옷은 입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차는 그냥 굴러가면 된다는 주의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 옷은 보기에 너무 지저분하고 엉성하지만 않으면 된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나는 내 옷 사려고 돈 쓸 때 결연한 짠돌이가 된다. 소방서에서 일하는 게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매일 똑같은 근무복을 입고 일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영화배우처럼 분위기 있는 사장님이 우리를 맞았다. 검은 뿔테 안경에 백발이 잘 어울렸다. 남자 긴팔 옷을 찾는다 말했더니, 저 쪽에 다 모여 있습니다. 한 마디 하시고 덧붙이는 말이 없었다. 주저리주저리 뭐가 신상이라는 둥 이런 옷이 잘 어울리시겠다는 둥 하는 게 없어 오히려 신뢰가 갔다. 말해 봐야 대충 가격표만 보고 옷을 고를 관상이라 부러 입을 떼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면이 두꺼운 네이비와 차콜 색상 웃옷을 두 벌 골랐다. 2XL을 사서 입으면 잘 맞지만 몇 번 세탁기 돌리면 줄어들기 때문에 3XL로 사이즈를 달라고 하는 걸 아내가 극구 말렸다. 피팅룸에서 두 벌 중 하나를 입고 나왔다. 전날 봄맞이로 머리까지 깎아놔서 말쑥하니 영 낯선 친구가 거울에 비쳤다. 아내는 좋아라 했다.

 한 벌에 3만 원 정도였다. 계산표를 보자마자 탐탁지 않아서 통통한 얼굴이 매력적인 아르바이트생에게 싱긋 웃으며 물었다.

 현금으로 하면 좀 싼가요.

 그런 거 없어요. 말하는 폼이 세상 쿨해서 좋았다. 동시에 내가 입고 온 옷을 척 펼쳐서 종이가방에 넣을 준비를 했다. 소매가 해지고 팔이 몽당하니 짧아진 옷은 허리께에 기름이 튀어서 누덕누덕했다. 대충 구겨 넣었으면 좋겠는데 그걸 또 차곡차곡 개서 가방에 넣었다. 아내가 얼른 그걸 손에 들었다.


 아파트 쓰레기장을 지날 즈음 손을 잡고 걷던 아내가 쌩 하니 달아났다. 그러더니 종이가방에서 낡은 옷을 꺼내어 헌 옷 수거함에 투수처럼 던져 넣었다. 곱게 접힌 옷이 아슬아슬하게 구멍을 스치며 안쪽으로 처박혔다.

 회식 때 입으려고 했는데. 입을 떼자,

 저걸 회식 때 입으려고 했다고? 답이 돌아왔다.

 새 옷에 뭐 묻으면 아깝잖아. 웅엉거렸으나 아내는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다는 눈을 하더니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좌우로 두 팔을 나풀대며, 리드미컬하게 놓는 발걸음이 꼭 사슴 같았다. 정말 어지간히 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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