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Apr 11. 2023

소방관 아닙니다

 퇴근해서 소방차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발코니 창문을 열어두고 아이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멀찍이 사이렌 소리가 들려도 그렇다. 펌프차, 물탱크 차, 구급차의 전자식 사이렌과 모터사이렌이 뒤섞인 소리는 시내 어딘가에 불이 났다는 의미고,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운전하다가 만나는 구급차도 반갑다. 뛰뛰뛰뛰 클락션을 눌러대며 달리면 심정지라던가 최소 뇌혈관계 응급 환자를 싣고 간다는 의미다. 그럴 때 나는 다른 차들과 한 몸이 되어 홍해처럼 갈라진다. 아슬아슬하게 그 사이를 비집고 달려가는 구급차를 보면 절로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소방서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나만의 독특한 이상심리라고 생각했다. 환자를 실으러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주변을 서성이던 얼굴만 아는 직원들을 몇 차례 마주하고, 어떤 날은 퇴직한 전직 소방관 영감님이 굳이 신호대기하던 구급차에 다가와 창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편 차로에서 마주 오던 차 운전자가 씨익 웃으며 구급차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는 걸 수십 번쯤 보고 난 뒤에야 이게 상당히 일반적인 현상이란 것을 깨달았다. 퇴근해서 소방차가 반가운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친숙한 것을 만나서 반가운 것과는 다르다. 긴박한 현장을 향해 달려갈 그들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하고, 나만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동료애 같은 거라고 하면 얼추 비슷할 것 같다. 돈 안 되는 일, 잘해봐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 일을 뭐 한다고 저리 열심히들 하는지 모르겠다. 대개는 나처럼 호구 잡히기 좋은 자질을 가져서 그렇다는 걸 안다. 장사 머리도 없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하기 싫어하고, 골치 아프게 머리 쓰는 일보다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게 속 편한 사람들. 우리끼린 소방관이지만 옷 벗으면 어디 가서 소방관이라고 말도 못 꺼내는 사람들.


 아이들과 봄맞이 무슨 축제 행사장을 찾았다. 줄지어 늘어선 간이천막에선 먹거리를 팔거나 악세사리를 만드는 체험 부스 따위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 구경하는 중에 섬찟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주변을 둘러보니 행사장 바리케이드 바로 인근의 밭에서 불을 놓고 있었다. 마른 고춧대며 잡풀 더미, 노후한 비닐하우스 비닐 따위가 시커먼 연기를 풀풀 날리며 타올랐다. 낮이라 보이진 않았지만 사방으로 불씨가 날리고 있을 게 빤했다. 바짝 마른 행사장 천막에 불씨가 튀기라도 하면 어쩔까 아찔한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바리케이드 너머 밭으로 걸어갔다. 아저씨들 몇이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불 놓는 거 처음 보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사장님, 여기 불 놓으시면 안 되죠. 그놈의 사장님은 아주 입에 배서 누굴 만나도 사장님이 나왔다.

 아, 이것만 하고 그만할 거예요.

 저기 행사장에 옮겨 붙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요.

 아, 씨, 뭔데요?

 예?

 뭔데요? 소방관이에요?

 네, 사실은 제가 소방관입니다. 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원체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체질이라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애먼 불길만 쏘아보던 나는 뒤돌아서 전화를 걸었다.

 어, 형, 난데. 오늘 근무야? 잘 됐네. 여기 OO사거리 옆에 행사하는 데 알지? 형네 관할. 어. 거기 누가 불 놨어 지금.

 그리고 채 오 분도 되지 않아 펌프차 한 대와 구급차 한 대가 출동했다. 관창에서 물줄기가 우산처럼 펼쳐지며 불을 잡았다. 물안개가 씩씩대며 잿더미 위로 솟아오르고,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남자들도 씩씩대며 주워섬길 말을 못 찾아서 담배만 입 안으로 구겨 넣었다. 나는 괜히 시비에 휘말릴까 봐 가까이서 구경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소방차가 돌아가는 길목에 서서 운전석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얼굴을 알아본 운전원도 씩 웃으며 경례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버리고 싶은 아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