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책을 낸다. 도에서 하는 머시기 문화사업인가에 선정이 되었단다. 엊저녁인가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했다. 애들이 시골집 가면 하룻밤 자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평소엔 내가 먼저 놀러 간다고 허락을 구한다. 그래서 굳이 엄마가 전화를 하는 게 이상했다. 좋은 일 있냐고 묻기도 전에 엄마 입이 먼저 떨어졌다. 책 낸다고.
엄마는 지금도 지방의 작은 신문사 기자로 일한다. 나이가 올해로 육십 일곱이다. 만 나이론 생일이 안 지나서 육십 다섯이지만 어쨌든 엄마도 자기 나이를 잊는 것처럼 나도 엄마 나이를 종종 잊는다. 워낙 팔팔하기 때문이다. 어디 취재라도 갈라치면 10킬로는 됨직한 카메라 가방 척 둘러메고 멋쟁이 면바지에 재킷, 안쪽엔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외삼촌(엄마 동생)이 만들어 준 조개 목걸이로 허한 목을 꾸민다. 그때는 화장도 한다. 베이스와 립만 슬쩍 찍어주는 거라 별로 달라지는 게 없는데 자신감을 한 겹 입은 탓인지 눈빛이 달라지는 느낌이다. 그러고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운전 솜씨를 뽐내며 차를 몰고 나간다. 하나 슬픈 사실은 머리숱도 나보다 많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점심 먹자고 하길래 11시쯤 가서 일찍 도우려 했더니 벌써 준비가 끝났다. 전라도에 취직하는 바람에 이사를 하느라 빨리 자리를 떠야 하는 여동생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여동생과 남자친구, 고모와 고모 딸까지 죄다 불러들였다. 우리 네 식구까지 합하면 총 열 명이었다. 열 명 밥상 준비가 11 시도 안 돼서 끝났으면 새벽같이 일어나 음식을 만들었을 게 빤해서 미안했다. 안 그래도 한 번씩, 너거들이 손님이냐. 일찍 와서 좀 도와. 해서 늦을 때마다 변명이 궁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달랐다. 뒤돌아 덩어리 고기를 써는 엄마 모습이 어쩐지 어깨춤을 추는 것 같았다.
언젠가 큰 형과 밥 먹던 이야기를 쓰면서 말했지만 우리 집은 꽤 잘 살았다. 그러니까 엄마는 동네에서 내로라하는 부잣집에 시집온 셈이었다. 엄마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 옛날에 할머니는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 들어서 매일 같이 밥도 먹고 여행도 다니는 시누이도 이 때는 까칠했다. 할아버지는 돈 버느라 집구석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이를 조율하는 요령이 없다. 그래서 엄마는 글을 썼다. 다락방 한 구석엔 열 권 정도 되는 아들의 사진 앨범이 페이지마다 꽂힌 엄마의 깨알 같은 편지와 함께 놓여 있다. 지금은 겁이 나서 들여다보질 못한다. 보다 울까 봐. 그리고 식구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일 어린 아들 앞에서 적던 일기도 무더기로 쌓아두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흔적조차 찾지 못할 수가 있나. 우좌당간 한글을 깨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어진 엄마의 글쓰기는 시집가서도 쫓아온 가난의 딱쟁이와 고등학교에서 마무리된 젊은 날의 배움도 흩어내지 못할 만큼 그 뿌리가 깊다. 그 자체로 푸릇푸릇한 엄마의 전쟁사다.
아이들이 환장하는 바베큐 그릴로 훈제한 통삼겹과 남은 숯불로 구운 고등어, 참나물을 넣어 새콤달콤 고소한 아버지의 최애 골뱅이 무침, 며느리가 시집온 날부터 좋아했던 메밀전병과 김장김치가 상에 올랐다. 글을 적다 보니 떠오른 건데,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얘기 꺼내는 걸 못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다음번 시골집 가기 전에 꼭 물어봐야 하므로 여기에 흔적을 남긴다. 아버지는 벌써 소주 마개를 돌려 깠다. 술 안 좋아하는 엄마도 웬일로 잔을 들어 아버지의 꼴꼴꼴을 받았다. 나는 잔만 받았다. 잔만 받아도 취할 정도로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