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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16. 2023

공짜 커피라서 죄송합니다

 사무실에는 원두커피 머신이 하나 있다. 공짜 커피라고 신이 나서 마셔대는 작자가 있으니 그게 바로 나다. 출근해서 퇴근까지 종이컵으로 다섯 잔은 마시는 것 같다. 일단 사무실 책상 앞에 앉자마자 한 잔, 출동 다녀와서 또 한 잔, 밥 먹고 한 잔, 또 출동 다녀와서 한 잔, 퇴근하기 직전에 아쉬워서 한 잔, 그러다 보면 금방이다. 솔직히 출동 많은 날은 그거보다 한두 잔 더 마신다.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종이컵이 커피에 불어서 누덕누덕해진다. 하지만 고요한 밤, 우리끼리는 긴 밤이라 부르는 그런 날이 있다. 시내의 다른 구급대는 정신없이 바쁜데 내 관할만 죽은 듯 고요한 날. 이럴 때는 하릴없이 커피를 마시는 게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다. 쉴 새 없이 아이들과 부대끼다 겨우 잠들었을 아내 생각에 죄스런 마음이 들고, 세금 도둑이 된 것만 같고, 윙윙윙 원두 갈리는 소리가 일하지 않는 자 마시지도 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다.


 신임 소방관이었을 때 일이다. 아직 긴 밤을 겪어보지 못했던 때라 바짝 긴장한 채로 야간 출동 대기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이 열렸고, 왠 늘씬하고 예쁜 여자가 하나 나타났다. 너무 미모가 빼어나서 소방서에 그런 사람이 찾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어색했다. 여자가 내가 앉은 의자 쪽으로 슬로우모션처럼 걸어오더니 말을 걸었다.

 오빠.

 네?

 자세히 뜯어보니 독립영화 찍는다고 까불던 대학생 시절에 잘 알던 후배였다. 우연 치고는 굉장했던 게, 내가 다녔던 대학은 저 남쪽 지방 어딘가에 있는 곳이라 그때 알던 사람들을 만난 일이 졸업하고 단 한차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배는 방송사 기자로 취업을 했다고 말했다. 이때가 주취폭력에 시달리는 구급대원들의 실태가 한참 이슈화되고 있던 시점이라 하룻밤 동안 구급대와 동행하며 취재를 하기로 얘기가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우리 관서를 찾은 이유는 통계상 도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바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날 그놈의 통계는 철저하게 기대를 배신했다. 주말 저녁이 무색하게 단 한 건의 출동도 없었고, 어쩐지 만날 놀고먹는 사람이 된 기분으로 새벽에 빈 손으로 돌아가는 후배를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도 긴 밤이었다. 출근해서 두 번째 커피를 내릴 때가 새벽 세 시인가 그랬고, 퇴근 직전에 세 번째 잔을 비웠다. 밤새 아픈 사람이 없어서 분명 다행인데 마음이 편칠 않았다. 결국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직업이란 생각이 들어 입맛이 썼다. 커피만 축내고 온 것도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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