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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25. 2023

배 나온 소방관이 소방관이냐

 결혼하기 직전 2년은 몸으로 먹고살았다. 살 뺀다고 운동에 꽂혔는데, 아예 운동하는 걸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체육관 트레이너를 했다. 소방관 일로 밥 벌어먹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그 덕이다. 필기와 체력으로 나뉘어 있던 입사시험은 일반직 9급에 비해 상대적으로 필기시험이 쉽고 대신 강한 체력을 요구했다. 필기를 먼저 합격하면 체력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지는데 공부 머리가 있는 일반 공시 지원자들이 모의고사 삼아 시험을 치르러 오는 바람에 나처럼 머리보다 몸의 뇌가 발달한 사람들이 시험에 떨어지는 일이 왕왕 있었다. 필기를 합격한 일반 공시 지원자들은 쿨하게 체력시험장에 나오지 않거나, 체력시험 과락(60점 만점 중 30점을 넘기지 못한 경우)을 맞고 내 길이 아니구나 역시 쿨하게 자리를 떴다. 붙은 나는 운이 좋았다. 집에서 막 걸음마를 뗀 첫째의 압박이 한몫했다.


 일 년에 두 차례 의무적으로 하는 119 구급대 건강검진 시즌이 오면 몸이 명함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닭가슴살을 갈아 마시고 여자친구 손보다 덤벨을 쥐는 일이 더 많았던 시간. 봄이 오면 꽃내음보다 봄맞이 운동을 시작한 체육관 회원들의 땀 내음을 더 많이 맡았던 시간이었다. 운동하며 알게 모르게 늘어가는 부상과 술 한잔 하면 달팽이 눈깔처럼 자취를 감추는 복근 탓에 언제까지 이 일로 먹고살 수 있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소방관이 된 뒤로는 그런 걱정을 않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이전보다 몸관리할 환경은 더 안 좋아졌고 트레이너 할 때 이상으로 몸을 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도 막 굴렸다. 못 움직이는 환자를 들것으로 옮겨 좁은 계단을 오르내릴 적마다 허리와 무릎이 곡소리를 냈고, 새벽의 출동벨 소리는 수 천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당직하고 퇴근해도 잠이 오질 않아 늘 피곤한 데다 머릿속에 남은 현장의 잔상을 지운답시고 습관적으로 술을 퍼먹은 덕에 통풍까지 왔다. 적어놓고 보니 짠하기보단 한심하다.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 건데.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내 탓이다.


 얼마 전에 올해 첫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술을 안 먹다시피 해서 이게 뭐라고 요번엔 자신감이 있었다. 체중은 미미하나마 줄었고 초음파에서 눈에 띄는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허리디스크는 이미 아작이 나서 더 안 좋아질 가능성이 없으니 걱정 없고, 청력이야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 싸대기를 갈긴 이후로 늘 왼쪽 귀가 반쯤 먹다시피 했으니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일전에 마취 없이 위내시경을 진행했다가 지옥에 다녀온 이후로는 수면내시경을 선호하는데, 저항 없이 의식이 사라지는 느낌이 싫어서 이번엔 마취되는 순간을 기억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정맥에 약물을 주사하며 말씀하셨다.

 좀 뻐근해요.

 그리고 뻐근함을 느낄 틈도 없이 의식이 날아갔다.


 지난밤은 출동이 많았다. 사실 지금 밤새고 난 뒤 전화기를 들어 끼적이는 중이다. 오후에는 일 년에 한 차례 하는 정기 체력검정 일정이 있다. 악력 테스트, 배근력 테스트, 유연성 테스트, 윗몸일으키기, 제자리멀리뛰기, 왕복 오래 달리기 6 종목이다. 몸으로 때우는 일이다 보니 이것도 자존심 싸움이다. 빌빌대는 소방관 말은 어딘지 설득력이 없다. 그러니까 어린 직원들보다 잘해야 한다. 저 형은 뭘 처먹길래 늙지를 않나 얘기가 나와야 한다. 비단 가오를 살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현장에 오래 남아있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배 나온 소방관이 소방관이냐. 나는 오늘도 그렇게 되뇌며 뛸 것이다. 배 나온 누군가들은 펄쩍 뛸 수도 있지만, 세상엔 타협해서는 안 되는 일도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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