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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Apr 27. 2023

나올 때는 느리고 들어갈 때는 빠른 것은?

  보드게임이 훌륭한 이유는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쉴 새 없이 입을 털며 교감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속임수, 음모의 일부, 방해공작이라 하더라도 대화하며 동맹과 배신을 손바닥 뒤집듯 반복하는 동안 믿을 놈 하나 없으니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깨달음을 준다는 점에서 유익한 놀이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타고난 성품이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첫째에게 자연스럽게 경쟁심을 심어주기 위한 방법으로도 보드게임 만한 게 없다. 사회 전체가 1등을 강조하기 때문에 경쟁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 나아가 아이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을 바엔 즐기는 법을 배우게 만든다. 박 터지게 싸우는 중에 웃을 수 있는 내적 여유를 길러주고 싶다. 1등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보단, 링에서 밀려나도 조바심 내지 않고 묵묵히 싸워야 함을 알게 해주고 싶다.


 아빠, 나올 때는 느리고 들어갈 때는 빠른 게 뭘까.

 몰라, 말 시키지 마.

 그것도 몰라?

 몰라,  말 시키지 마.


 나를 8년이나 지켜본 딸은 어떤 대화가 아빠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지를 꿰고 있다. 쿼리도(quoridor)란 이름의 보드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바둑판처럼 생긴 정사각형의 나무판 위에서 자신의 말이 상대방의 진영까지 이동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자신의 차례에 말을 한 칸씩 움직이거나, 상대방이 이동하는 길목에 장애물을 하나씩 세울 수 있다.


 나올 때는 느리고.

 말 시키지 말라니까.


 나올 때 느리고 들어갈 때 빠르다고? 혼란한 틈을 타서 딸아이의 말이 휘리릭 움직인다. 그게 뭐지? 인생인가. 엄마 뱃속의 비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동안 길고 긴 고통을 감내하다가, 죽는 순간은 수면내시경 마취처럼 훅 가는? 아차 실수, 엉뚱한 곳을 막았다. 아니면 관? 관에 뉘이기 전에 종교의식도 하고, 염을 하고, 베 옷을 온몸에 둘둘 감느라 시간을 질질 끌다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니. 이럴 수가, 상대방의 말이 벌써 목전까지 왔다. 더 이상 길을 막을 장애물도 남지 않았다. 딸의 승리다. 아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경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경쟁에서 승리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 크다. 그것은 남을 넘어설 때의 우월감에서 비롯한다기보단 오히려 경쟁구도 내에서도 자신을 증명했다는 성취감에 가깝다. 어린 시절, 심성이 유약한 아이였던 내가 그랬고, 그 기질을 첫째딸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염려가 되었다. 승리할 때와는 달리 패배를 맛보았을 때, 내가 그랬듯이 자존감을 회복하느라 남들보다 무진 애를 써야 할 아이의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이기고 지는 것에 덤덤해지기까지는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구급차를 타면서 오만 인간군상을 만나고 거기에 수도 없이 나를 비추어 본 덕도 있다. 아니, 거의 그 덕이다. 경쟁이란 사람으로서 먹고, 싸고, 사랑하고, 배우고 깨닫는 일에 비하면 그냥 유희였다. 경쟁에서 이기면 잘 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지든 이기든 잘 살아내는 게 중요했다. 아이가 그걸 깨닫게 하려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보다 경쟁이 주는 재미를 먼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보드게임처럼 말이다.

 나는 여러모로 아이 앞을 막아서는 동네 뒷산이 될 심산이다. 아이가 나를 넘어설 즈음엔 밤새 몰래 땀 흘려 삽질한 흙을 한 무더기씩 퍼다가 정상에 쌓아둘 것이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부모와 그걸 넘어서려는 아이. 그렇게 지난한 성취와 좌절의 과정을 겪게 만들 것이다. 그럼으로써 네 인생에서 경쟁이 그저 유익한 놀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비록 온전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 생각이 팍팍한 삶을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답이 뭔데?

 뭐?

 나올 때는 느리고 들어갈 때는 빠른 거.

 아 그거? 콧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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