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이었을까. 계획도 없이 무작정 바다로 떴다. 출발 이틀 전에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고른 것도 그냥 가격이 적당하고 깨끗하다는 게 이유였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매사 계획이 있다던데. 1년 치, 10년 치, 50년 치의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맞춰 산 덕에 성공했노라 말하는 게 그들의 단골 멘트라면 내 경우엔 정 반대다. 내 인생엔 50년 치는커녕 50분어치의 계획도 찾아보기 힘들다. 매사 즉흥적이다. 결혼도 무작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다.
숙소에 도착하니 우리 네 식구 겨우 발 뻗고 잘 침실과 부엌을 겸하는 비좁은 거실이 반겼다. 어째선지 중간에 복도까지 놓여서 더 좁아 보였다. 카메라 렌즈를 광각으로 펼쳐서 널찍하게 찍었으리라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로 좁을 줄은 몰랐다. 내가 하는 게 그렇지. 입맛이 씁쓸해져서 대충 짐을 풀어놓고 바깥으로 나갔다.
숙소 앞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작은 항구였다. 맞은편 산자락에 오밀조밀하게 자리한 오래된 주택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정겨웠다. 테트라포드가 해안선을 따라 쭉 늘어서서 아이들이 놀기엔 좋지 않았다. 모래사장이 나올 때까지 걷기로 했다. 아이들은 바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벌써 흥분해서 앞으로 앞으로 달아났다. 차 타느라 녹초가 된 아내는 멀찍이 뒤에서 추적추적 걸음을 뗐다.
너른 바위가 길게 이어진 해변이 나타났다. 중간중간 시간에 깊게 패인 물웅덩이를 아이들이 작은 짐승들처럼 껑충껑충 넘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마치 따로 떼어 놓기라도 한 모양으로 둥글고 좁은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모래가 굵어서 바닷물이 흙탕이 되지 않아 좋았다. 꼭 계곡물처럼 얕은 물아래가 훤히 보였다.
우리는 바다에 오면 늘 조개껍질을 줍는데, 이곳 해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물 밑 바위에 줄줄이 늘어선 야생미역을 떼어다 국 끓여 먹을 거라며 해가 잘 드는 곳에 말려놓았다. 그러던 중에 아이들이 두 손바닥 위에 무언가 모시다시피 들고 와서 물었다. 아빠, 이게 뭐예요?
반짝이는 자갈이었다. 정확히는 깨진 유리가 오래도록 파도에 깎여서 자갈처럼 둥글어진 것이었다. 처음엔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곳 해변엔 그런 유리로 된 자갈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우리는 뭐 굉장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유리자갈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색깔로 보아하니 맥주병, 소주병, 코카콜라, 사이다, 오렌지 또는 파인애플맛 음료수 병 등등 종류도 다양했다. 우리 셋은 엄마가 돌아가서 밥 먹자고 할 때까지 정신없이 채집을 했다. 어느덧 유리자갈은 내 두 손바닥이 가득 찰 만큼이 되었다.
발만 담그겠다고 시작한 물놀이는 결국엔 팬티까지 다 적시고 나서야 이를 덜덜 떨며 마무리가 되었다. 주머니 하나 가득 유리자갈을 채우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구급차 타면서 깨진 유리 같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난다고. 자의던 타의던 박살이 나서 날카로운 조각이 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도 지금 내 손에 쥔 유리자갈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질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세월이 답이 될 수도 있고, 뜻밖의 구원자가 인생에 등장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바다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죽지 않고 바다에 남아 있다면, 깨진 지금도 빛나고 있는 당신을 파도가 안아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