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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04. 2023

달이 쫓아오는 밤에

 짬처리를 하는 날이었다. 군필자들에겐 익숙한 말일 텐데, 밥 다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들을 한 데 모아두는 걸 짬이라 한다. 일주일에 한 차례 장을 보는 것과 비슷한 간격으로 우리 집에서는 소위 짬처리라는 걸 한다. 굽다 지쳐서 다 못 구운 고기, 욕심만 앞서서 여행길에 가져갔다가 절반도 넘게 남겨 온 냉동만두, 애들이 안 좋아해서 찬장 깊숙이 영원토록 처박힌 쌀국수 다발, 요리하다 남은 자투리 야채 등등, 등등. 그것들을 식탁에 펼쳐 놓고 오늘 내로 어떻게든 뱃속에 밀어 넣을 궁리를 한다. 그냥 두면 망가지니까. 또 짬처리를 잘해야 식비도 절약할 수 있다.


 국수 먼저 삶아 대접에 담고 그 위에 조각낸 상추와 얇게 썬 양파를 올렸다. 엄마가 취재 가서 받아 온 유명한 냉면집 비전의 양념장 두 큰 술에 참기름 쪼르륵 얹으니 위장의 멱을 잡아 흔드는 향기가 풍겼다. 대패 삼겹살과 통마늘을 그릇 가장자리에 담았다. 비빔국수에 싸서 함께 먹을 작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스레인지 한 구석에서 찜기로 쪄낸 냉동만두까지 담아 그럴싸한 짬처리 한 끼를 완성했다.

 말이 좋아 한 끼지 양으로 치면 우리 네 식구 두 끼는 될 것 같았다. 한 잔 하면서 먹으면 너끈히 먹을 수 있는데 또 그러긴 싫었다. 그래서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다들 전쟁처럼 먹었다. 지금 이걸 해치우지 못하면 정말 음식쓰레기 되는 거야. 하는 비장한 심정으로.


 전장에서 귀환한 우리는 패잔병처럼 무거운 몸을 끌고 현관문을 열었다. 소화시키자는 건 핑계고 밤공기를 쐬고 싶었다. 요 며칠은 정말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20대였다면 밤새 술 먹고 걷고 술 먹고 걷다가 동트는 여명과 함께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이 아주 일찍 들어왔네 아들. 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래서 남자는 혼자 살면 안 된다. 결혼해야 없던 철딱서니가 강제로라도 이식이 된다.


 아이들은 걷는 법이 없었다.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산책로 위에서 뛰다 멈췄다 쪼그렸다 펄쩍 뛰고, 길 옆 둔덕을 우다다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둘째가 길 반대편으로 가는 징검다리 위로 소금쟁이처럼 펑펑 튀어갔다. 작년 가을만 해도 꼭 아빠 손을 잡고 건너던 다리였다. 나와 아내는 제법 속도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조금 기분이 이상해져서 서로 손만 매만지며 별말 없이 걸었다.


 아빠, 저거 봐! 둘째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응?

 달이 쫓아와!

 그래?

 집에서부터 쫓아왔어!

 나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 차 타고 밤에 어디 가면 꼭 같은 말을 했다. 달이 쫓아온다고. 사실 달이 내가 훌륭해서 주목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모래알보다도 보잘것없어서 그런 착시가 생기는 것인데, 어린 마음은 정 반대의 생각을 했다. 세상이 나를 주목하고, 내가 주인공이고, 사랑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늘 행복했다. 언젠가 내 자식들이 자비 없는 진실을 태연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이 넓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하다. 그 진실들에 무수히 두드려 맞다 보면 대장장이가 달군 쇠를 두드려 펴듯이 넓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이 그저 좋은 대장장이들을 만나 마음이 부러지지만 않기를 기도하는 수 외엔 없다.


 돌아오는 길에 둘째 유치원 선생님을 만났다. 전동 킥보드를 타고 귀가하던 선생님은 멀리서 보면 긴 생머리라 꼭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가세요? 물으니, 유치원이 너무 좋아서요. 대답이 돌아왔다. 반어법인지 있는 그대로의 의민지 알 길이 없었다. 저녁 8시였고, 선생님은 아마도 12시간도 넘게 유치원에 머물렀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웃는 얼굴은 세상 해맑아서 더 헷갈렸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의 밤길을 갔다. 멀찍이 킥보드를 타고 가는 선생님의 머리 위에도 아이들과 똑같은 달이 쫓아와 비췄다.


 헬멧만 쓰면 완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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