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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12. 2023

119 덕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아내를 만나기 한참 전에 사귀었던 친구가 있었다. 굳이 한참 되었다고 덧붙이는 까닭은 실제로 내가 이십 대 중반 즈음이었을 때의 일이기도 하고, 언젠가 아내가 이 기록을 보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그저 소재로 쓰고 싶었을 뿐 구질구질한 마음이 남은 건 아님을 미리 밝혀두고자 함이다.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더 구질구질한 게 함정이다. 큰일이다.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미 서너 차례 헤어질 위기를 넘긴 덕인지 그녀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여자친구와 재즈피아노를 배우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나는 신용카드 쓰듯 시간을 썼다. 주급 15만 원짜리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우리는 1년 반 동안 매일 술을 마셨고 번 돈을 전부 술값으로 탕진했다. 하루하루 젊음이 증발했다. 내 인생을 향한 미안함과 미움이 카드빚처럼 쌓였다. 그러다 결국 파산신청을 했다. 헤어지자고 말했다.


 며칠 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음울한 목소리는 과장이 없었고, 그래서 더 섬찟했다.

 나 죽을 거야. 지금 부엌에서 칼 들고 왔어. 이걸로 죽을 거야. 하며 입을 열기 시작한 그녀는 내가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고 설득하는 1시간 여 동안 부엌칼이 자신의 팔목을 파고들어 가는 장면을 강약 없는 모노톤으로 생중계했다. 전화가 끊어졌다. 제구력 없는 투수가 내 심장을 뜯어다 시속 160km로 집어던졌고, 포수는 심지어 맹인이었다. 수정할 길 없는 구식 타자기가 텅텅텅 소릴 내며 백지가 된 머릿속에 활자를 찍었다. 죽는다. 나 때문에 죽는다.


 빨리 가주세요.

 네에. 하고 답한 택시기사는 세상 여유였다. 그날따라 신호란 신호는 다 걸렸다. 내 맘 급하다고 택시기사의 마음도 급해지는 건 아니었다.

 잔돈은 됐습니다! 신경질적으로 뱉으며 차 문을 닫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사님 좋은 일만 시킨 거였다. 택시기사로 하여금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할 심산이었으나 아마도 빙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다음 손님을 태웠을 것이다.


 여자친구 집 문을 두드렸다. 주택공사에서 지은 오래된 아파트 1층이었다. 새벽이라 처음엔 조용히, 점점 마음이 급해져서 결국엔 복도가 쿵쿵 울릴 정도로 세게 두드렸다. 반응은 없었다. 전화를 걸었다. 안쪽에서 벨소리만 요란할 뿐 기척이 없었다. 다시 타자기가 텅터덩텅 속사포처럼 활자를 찍었다. 죽었다. 분명히 죽었다. 내가 죽였다. 눈물을 참으니 콧물이 되어 흐르고, 그걸 또 참으니 숨이 막혔다. 전화기를 들어 119를 찍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119입니다.

 여하힝후하 훅은 허 하타효. 말 반 울음 반의 신고.

 여자친구가 죽은 것 같다고요? 그걸 또 잘도 알아먹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소방관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고 채 오분도 되지 않아서 차 두 대가 도착했다. 하나는 문을 개방하기 위해 구조대가, 다른 하나는 환자(혹은 시신)를 살피기 위해 구급대가 타고 있었다. 구조대는 창문의 철창살을 떼어내고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창문으로 진입한 날렵한 구조대원이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여자친구의 집 현관문을 안쪽에서 열었다.

 구급대 안 들어오셔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어. 내 쪽을 보고 말하며 구조대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라힜나효?

 직접 들어가 보세요.


 여자친구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방 안 가득 술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속옷만 입고 있어서 침대 구석에 구겨진 이불을 덮어주는 동안도 드렁 드렁 세상모르고 잤다. 함께한 시간을 핑계로 각질처럼 드문 드문 내려앉은 마음이 싸그리 날아갔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구조대원들은 이미 철창살을 원래의 모습으로 조립해 놓고 떠났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 밤 있었던 일을 평생 알 길이 없다.

 혹 당신이 앙심을 품고 누군가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전화를 하려거든 맨 정신으로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술 먹고 나 죽는다 전화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119가 다녀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냥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되었건 글은 잘 마무리되었다. 뜬금없지만 나는 내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괜히 10년도 더 된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마음이 찔려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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