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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08. 2023

기다려줘

  119에 신고하는 대부분의 토혈환자는 술을 많이 퍼먹어서 역류성 식도염이 도지는 바람에 구토물에 미미하게 피가 배어 나온다던가, 마찬가지로 술을 퍼먹고 옆자리 손님과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을 하는 바람에 입안이 터져 피가 나는 걸 두고 피를 토했다고 말을 한다. 당연히 구급차를 부르지 않는 게 양심적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토혈환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 십분 내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초응급이다.


 대낮에 아버지가 피를 토한다고 신고가 들어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간암 진단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항암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앳된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과 슬픔이 뒤덤벅이 되어 전해졌다. 옆에서 신고자 아버지의 새된 신음소리가 전화받는 쪽 귀에서 이명처럼 길게 울렸다.

 현장에 도착하니 바닥에 선홍색 피가 그득 이었다. 환자는 말할 기운도 없는지 숨 쉬는 중간중간 길게 신음소리만 낼뿐 묻는 말에 답을 못했다. 속눈썹이 벌써 축축하게 젖은 그의 아들이 대신 말했다. 환자는 당일 아침부터 어지럼증과 함께 속이 불편한 증상이 있었고, 아들과 함께 길을 걷던 도중에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혈압을 재는데 수축기 혈압이 겨우 70 언저리에 잡혔다. 맥박도 통통 튀는 게 아니라 둑둑둑둑 나무토막 두드리듯 손목동맥을 짚은 내 손 끝을 울렸다. 신고가 들어온 곳이 골목이라 엉망으로 주정차된 차들을 빠져나가느라 운전원이 진땀을 뺐다. 큰길에 들어서자마자 미친 듯이 병원으로 쏘았다. 아빠, 안 돼. 아빠, 안 돼. 덩치만 컸지 겨우 중학생 정도로 뵈는 환자의 아들이 병원 가는 내내 아빠에게 조르듯이 말했다.


 가는 동안도 혈압이 떨어져서 피 묻은 환자의 발아래 모포를 베개처럼 접어 받쳤다. 병원도착할 즈음해선 수축기가 60대에 잡혔다. 환자 분류소의 간호사가 혈압을 재기 무섭게 병실 문을 열었고, 그녀의 몇 마디 말에 응급실의 간호사며 응급구조사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었다.

 들것을 빼서 병원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는 환자의 아들이 시선을 아무데나 두고 입술이 벌어져서 그냥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가는 길을 몰라서 멈춰 선 듯 보였다.




 아버지가 어버이날 번거롭게 모이지 말고 주말에 미리 시골집에서 식사하자고 말씀하셨다. 엄마 통장으로 고깃값 하시라고 10만 원을 부치고, 친한 빵집 사장님께 케이크를 하나 주문했다. 밥 먹는 날 찾으러 갔더니 주문한 것보다 사이즈를 훨씬 크게 만들어 놓았다. 요새 다른 사업 구상한다고 바빠서 얼굴은 뵙지 못했지만 전화로나마 감사 인사처럼 전했다.

 미치겠어. 왜 그래요 진짜?

 맛있게 먹어요. 주말 잘 보내구. 흥흥흥 하고 사장님이 콧노래처럼 답했다.


 하루 전날 재워둔 엄마표 LA갈비가 취취 소릴 내며 불판에서 익어가자 아버지가 한 손에는 25도짜리 일품 진로를, 다른 한 손에는 소주잔 두 개를 가져오셨다. 오랜만에 아들이랑 한잔 할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들썩들썩 어깨춤이었다. 내가 일 없으면 술 안 먹는다고 선언을 하는 바람에 분명 오늘만 기다렸다. 아버지는 나랑 한잔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는 건지 민망한 건지 시시콜콜 주워섬기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몇 잔 들어가면 꽤 수다스러워졌다. 그중에 절반은 잔소리고, 절반은 정치꾼들 험담과 후회스러운 아버지의 과거사였다. 그리고 아들과 아들 가족(며느리, 손주)에 대한 진한 애정을 추임새처럼 집어넣었는데, 솔직히 그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거의 최근에 와서야 그걸 알았다. 아버지의 잔소리와 패배의 역사강의를 지긋지긋해하던 나는 굳이 그런 얘길 꺼내는 아버지를 조금 이해할 만큼 나이가 먹었다. 아직 온전히 알진 못하더라도 말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카오디오로 김광석의 노래를 틀었다. 김광석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말해서 노래가 더 슬프다. 떠나간 사랑을 벌거벗은 여인의 사진을 보며 잊을 수 있다고 말하는 노래나, 죽은 아내에게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말하는 노래 같은 건 곱씹을수록 마음이 무겁다. 그나마 덜 묵직한 노래를 골라서 재생했는데, 이날 따라 그 또한 불가능한 것을 노래하는 것 같아 마음이 뒤숭숭했다.


 기다려줘

 기다려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김광석의 ‘기다려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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