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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13. 2023

아재사원의 은밀한 취미

 키감이 너무 구린데.


 돈 쓸 핑계를 하나 찾은 것에 불과했다. 수년을 타이핑한 키보드가 갑자기 마음에 안 든다니. 핑계인 걸 알면서도 눈으로는 나의 고독하고 장대한 여정에 함께할 동반자를 찾아 인터넷을 뒤졌다. 얼마 전 지인이 너 글 쓰는 거 좋아하면 기계식 키보드를 하나 들여봐라 라고 운을 뗀 게 시작이었다.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다! 속으로 뇌며 괜한 소비를 멈춰보려고도 했으나 명필이 아닌 게 함정이었다.


 기계식 키보드는 일반적인 멤브레인 키보드와 구분된다. 키캡(손가락이 닿는 뚜껑 부분) 아래에 키마다 각각 하나의 스위치가 마련되어 있고, 이 스위치는 키캡을 받치는 축과 스프링 등으로 이루어졌다. 축의 색상이 빨강, 갈색, 청색, 녹색, 흑색, 스카이블루 등으로 나뉘는 것에 따라 각각 적축, 갈축, 청축, 녹축, 흑축, 스카이축이라 스위치를 명명한다.

 색상별로 키압, 다시 말해 키를 누를 때의 감각이 천차만별이고 타건을 했을 때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의 결도 하나하나 다르다. 때문에 기계식 키보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손맛'을 찾아내기 위해 무진 연구를 한다. 초보자들은 키보드 전체의 스위치를 바꾸고, 고수가 되면 키 별로 스위치의 종류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자주 쓰면서도 때때로 엄지손가락을 받치고 있는 역할도 수행하는 스페이스 키는 묵직한 흑축을, 많이 쓰진 않지만 줄바꿈이라는 존재감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엔터 키엔 적당히 무거우면서도 척척척 시원시원한 소릴 내는 청축을 쓰는 식이다. 내가 사용하는 키보드는 활자 키가 전부 스카이축으로 되어 있다. 손가락을 놀릴 때마다 서걱서걱사라락 하는 소리가 마치 종이에 연필로 글을 적는 듯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글도 어쩐지 더 잘 나오는 느낌적인 느낌이다.


 손과 귀가 즐거운 단계를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눈의 즐거움을 찾는 영역이다. 이 취미의 끝판왕이다. 이른바 키캡놀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는데, 키의 뚜껑에 변화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색상을 변경하기도 하고, 자주 쓰는 기능키에 작은 인형을 매달기도 한다. 애용하는 회사 제품 중엔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를 어항 채로 가져다 키캡에 씌운 것이 있는데, 키보드 아래 LED에 불이 들어오면 막 번쩍번쩍한다. 사고 싶지만 뚜껑 하나에 만 원이다. 차마 자신이 없어서 참았다.

 소방서에 들고 출근하는 내 전용 키보드에도 인형이 매달려 있다. 지금은 체리, 문어, 곰돌이로 굳혔다. 멀티미디어 키에 덧씌운 체리는 상큼한 음악을 재생하는 데 쓰고, 보글보글한 감촉의 곰돌이는 험한 출동 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만지작 거리는 데 쓴다. 파티션 너머 머리 반쪽만 자체발광하는 대머리 팀장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문어를 마구 연타한다. 쓸모없어 보여도 각각의 쓰임이 있는 셈이다.


 축 교체 비용은 개당 몇백 원, 제작자의 공이 들어간 캡은 몇천 원 수준이다. 다른 돈 들이는 취미들에 비하면 저렴하면서도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엔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이고, 여자들의 시선을 끌기엔 다소 투박해서 아재들 한정의 취미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점은 아쉽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이해 못 하는, 돈 없는 아재들의 은밀한 취미다.


 기계식 키보드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멤브레인 키보드나 직접 화면 터치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키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에서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스위치의 금속판이 붙었다 떨어져야 컴퓨터가 비로소 키를 인식하는 기계식 키보드의 메커니즘처럼, 일하는 사람 간에도 붙었다 떨어지고 다시 붙는 사람냄새가 나는 작동원리가 심어질는지 모른다. 달가닥 달가닥. 상상만 해도 즐거운 직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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