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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16. 2023

환상의 핫초코

 내겐 뿌리 깊은 교사 불신증이 있다. 어린 시절엔 혐오증에 가까웠지만 나이를 먹는 동안 혐오에서 불신 수준으로 순화되었다. 소방서 다니면서 세상엔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한 뒤론 오래도록 잠자던 인간에 대한 연민이 내 안에서 싹을 틔웠고, 그래서 요즘은 그 불신증마저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교사는 어렵다. 잘 모르겠다. 스승의 날 학교에서 나눠준 편지 봉투에 오로지 편지를 적어 보낸 우리 엄마 덕에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맞은 기억이나, 교사 휴게실에서 여학생들 허벅지를 매만지던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의 얼굴이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왼쪽 귀에서 이명이 들릴 때마다 턱이 돌아가도록 나의 왼뺨을 치던 6학년 담임의 크고 두꺼운 오른 손바닥이 떠오르는 건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 시절은 원래 그런 거였나 싶다. 그렇게 믿고 싶다.


 좌우간 원인을 찾기 어려운 교사 불신증은 대학 가서 까지 나를 쫓아다녔다. 교사 불신증에서 교수 불신증으로 타이틀만 바뀌었을 뿐이고, 나는 끊임없이 이른바 '젠체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냉소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말이 어눌한 교수는 말더듬이라 무시하고, 말 잘하는 미남 교수는 동성애자 취급하며 머릿속에서 팬티스타킹을 입혀버렸다. 자애로운 인상의 여교수가 집에 돌아가면 남편과 애들을 쥐 잡듯이 잡는 상상을 했다. 정말 뭐 하나 제대로 배울 수가 없었다. 권총(F)으로 쉴 새 없이 두들겨 맞으며 1년을 버렸다. 그리고 군대로 도망쳤다.


 제대한 남자들이 으레 그러듯, 나도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전사의 마음으로 복학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쉽지 않았다. 여전히 교수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령도 전략도 없었던 나는 수강신청도 엉망으로 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신청한 교양 수업에서 지금껏 단 한 명, 선생님이라 부를 마음이 생기는 사람을 만났다.


 작문 수업이었다. 그것도 영작이었다. 인기가 있을 리 없었고, 신청한 인원 중 절반은 몇 번 수업을 나오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수업을 진행한 교수님은 외국인 할머니였다. Dr.G(이니셜로 대체함)는 전형적인 미국 할머니들의 풍만한 몸에, 덩치만큼이나 넉넉한 미소로 무장하고 있었다. 목까지 내려오는 하얀 곱슬머리마저 둥실둥실 나를 향해 웃는 것 같았다. 선생이 싫지 않은 기분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괜히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어서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초딩 때 그림일기 이후론 뭘 써 본 일이 없어서 문법도, 흐름도 엉망인 글을 틈날 때마다 가져가 보여줬다. 그럴 때면 Dr.G는 오피스를 방문한 나에게 동글동글한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코를 타 주었다. 그리고 꼭 같은 이야기를 했다.


 You are a writer. You know it.


 졸업한 뒤엔 먹고살기 바빠서 그때의 따끈했던 기억은 재미없고 냉랭한 새로운 경험들 뒤로 밀려났다. 부쩍 뭘 끼적이는 일이 많아진 요즘 갑자기 Dr.G가 떠오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론 정 없는 나를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 좀 슬프다. 염치 불고하고 전화연락이라도 해볼까 싶어 스승의 날이었던 어제 모교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은 몇 년 전에 퇴직하셨고, 이메일이나 연락처 등 퇴직한 분들에 대한 정보는 학교에서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가 학교 졸업생이라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섭섭하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게 뻔했고,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불행인 듯 아닌 듯 Dr.G의 핫초코는 영영 내 머릿속 환상으로 남았다.


 편의점에 들러 마시멜로가 들어있는 핫초코 컵을 하나 샀다. 아니, 2+1이라 세 개나 집어 왔다. 날도 푹푹 찌는데 먹지도 않을 걸 뭐 하러 잔뜩 가져왔냐고 아내가 타박을 줬다. 아무도 안 주고 내가 세 개 다 먹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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