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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23. 2023

동굴 인간

 플라톤은 동굴비유로 항구적인 실재를 설명했다. 적어 놓고 보니 엄청 뭐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학적이면서도 기품 있는 어조를 유지하기엔 나의 능력과 비위가 모자란다. 쉽게 말해서 사람은 원래 동굴에서 살고, 눈앞의 벽에 비친 동굴 밖 세상의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는다.  더더욱 쉽게 말하면 포장도 뜯지 않은 포켓몬 빵 속 띠부씰을 피카츄, 라이츄, 파이리, 꼬부기라고 멋대로 단정 지어버린다. 포장을 벗겨내지 않는 한 영영 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지령을 듣고 출동했으면 대개 문은 열려 있고, 신고자가 맨발로 구급대를 마중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쿵쿵. 소생장비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삼십 초쯤 지났을까, 느릿하면서도 날카롭게 기이이이익 소릴 내며 문이 열렸다. 눈두덩에 그림자가 더께더께 앉은 신고자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들어오라 마라 얘기도 없이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축 처진 어깨, 방향을 잃은 듯 비척거리는 걸음, 수년간의 현장 짬밥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죽었구나. 그것도 죽은 지 좀 되었구나.


 문을 열어 준 남자는 쓰러지듯 식탁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스뎅 밥그릇에 막걸리를 한 사발 가득 따르더니 마치 친한 벗의 제사상에서 술을 먹듯 허공에 건배를 한 번 하고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손을 들어 식탁 맞은편을 가리켰다. 거기엔 가지런히 깔린 이부자리가 놓였다.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제세동기 전원을 켜고 망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눈을 마주칠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이불을 천천히 걷어냈다. 비쩍 마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리고, 번쩍 눈을 떴다.

 

 우왁! 왁! 악!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마른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막거리를 들이켜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이 개노무 새끼! 또 지랄병이네!

 선생님, 괜찮으신, 거죠?

 멀쩡하지요! 요번엔 또 뭐라 그래요?

 그, 돌아가셨다고.

 이 개노무 새끼가, 이젠 뒤지라고 고사를 지내네!

 진정하세요. 그럼 아무 일 없는 거죠? 비쩍 마른 남자와 신고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막걸리를 마시던 남자가 다시 손을 들더니 이번엔 베란다 쪽을 가리켰다.

 그만 좀 해 이 새끼야! 비쩍 마른 남자가 악을 썼다.


 혹시 몰라서 집주인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집안을 살폈다. 옷장 문을 열어 보고, 보일러 실도 살폈다. 냉장고도 괜히 한 번 열어봤다.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장비를 챙기는 동안 비쩍 마른 남자는 눈이 부신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신고자도 다시 빈 그릇을 부연 막걸리로 채우고, 부연 눈으로 또 누군가와 건배를 했다. 그건 그냥 지랄병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뭐가 보였던 걸까. 죽음에 한 발 걸치고 지낸 시간이 오래다 보니 무얼 믿어야 할지 헷갈렸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저 믿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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