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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26. 2023

애 잡는 나라에서 애 키우기

 요즘 학교 참 좋아? 밥도 만들어 오고?


 첫째가 방과 후 활동 시간에 만든 볶음밥을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월요일은 미니어처 만들기, 화요일은 로봇 과학, 수요일은 3D펜, 목요일은 쿠킹 클래스다. 금요일은 할머니집 놀러 가야 하니 따로 뭐 신청하질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수업은 오후 한 시면 끝나기 때문에, 집에 와서 놀던 학교에서 하고 싶은 방과 후 활동을 하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방과 후 활동 선택지 중엔 영어 회화나 한자도 있었지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어학을 재밌어했던 나와는 달리 첫째는 오로지 만들기 쪽 수업만 주구장창 팠다. 손재주가 잼병인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술 잘하는 애들 보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첫째가 뚝딱뚝딱 뭘 만들어 오면, 둘째와 아빠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우와, 언니, OO아,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는 게 염려스럽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요즘이지만, 나는 요새 초등학교가 좋아졌다는 걸 자주 느낀다. 비록 학생과 부모 한정의 입장이긴 하나 나 어릴 적과는 학교의 공기가 많이 달라졌다.

 일단 선생님들이 좋다. 친절하고 똑똑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 더 이상 국영수를 몸으로 체득시키는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변화다.

 아이들의 재능과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도 다르다. 얼마 전 (집에서 논다고 오해 살까 봐) 잘 차려입고 첫째의 학부모 참관 수업에 참여한 일이 있는데, 선생님이 진행한 수업의 이름이 무려 '여름'이었다. 선생님께서 어디 연극배우 못지않게 구연동화를 들려줌으로써 그날의 테마였던 가족 사랑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고, 종이를 예쁘게 꾸미고 가위질해서 심부름 쿠폰을 만들었다. 비록 평소보다 수업에 공이 더 들어가긴 했겠지만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겐 충격이었다. 방과 후 활동도 수업 이상으로 다채롭다. 첫째 친구 중 하나는 방과 후에 보드게임을 배운단다. 학교에서 보드게임을 '배운다'니, 정말 끝내준다.


 당연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아이들에게 있어 지금의 학교생활은 꿈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 되어선 안 되는 건데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

 

 자, 이제 너의 재능과 취향은 잠시 접어 두고 본격적인 공부라는 걸 해보자. 판타지 소설이라 믿어 왔던 너의 세계는 사실 웃음기 하나 없는 다큐멘터리인데, 네가 실망할까 봐 여태 말하지 않고 있었단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너는 너만의 상품가치를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단다. 네 아빠나 엄마 사는 꼴 보면 답 나오지? 인생은 현실이야.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은 뭐다? 그렇지. 네가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 해. 만화책 보고 있을 시간 없어. 어허, 소설책도 아냐. 위인전? 글쎄, 그냥 그 시간에 문제 하나라도 더 푸는 습관을 들이자.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야.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월급봉투의 두께가 달라지고, 사는 집의 크기가 달라지고, 배우자의 얼굴이 달라지는 거야. 천국이냐 지옥이냐, 간단하지? IT'S THAT SIMPLE.


 얼마 전에 둘째가 유치원에서 꽃씨를 한 움큼 가져온 일이 있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아니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어서 화분에 막흙을 퍼담고 씨가 겹치든 말든 전부 좁은 화분에 때려 넣고 다시 흙을 덮었다. 어려서부터 식물이란 걸 키워본 일이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두면 적자생존이라 경쟁을 뚫고 나오는 놈이 있으리라 여겼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둘째는 날마다 물을 주었고, 무거운 막흙에 덮인 꽃씨들은 그 안에서 까맣게 썩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혹시, 꽃을 피우는 것도 사람 키우는 것 이상으로 신경을 써야 하는 거였나? 아스팔트를 뚫고 자란 민들레처럼 그렇게 제 스스로 살길을 찾는 게 아니었나? 시간이 지나도 싹이 오르지 않는 자신의 꽃씨를 보며 둘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너무 맘이 아팠다. 그래서 다이소까지 걸어가 분양토를 사고, 꽃씨를 새로 샀다. 꽃씨가 담긴 봉투에 친절하게도 심는 방법과 개화시기까지 설명이 되어 있었다.

 둘째가 유치원 간 사이 화분에 담긴 흙과 썩은 꽃씨를 몰래 버렸다. 다시 화분에 분양토를 담고, 물로 적시고, 1센티 깊이로 작게 움틀 자리를 만든 뒤 거기에 한 알 한 알 꽃씨를 심었다. 수레국화였는데, 씨앗 하나가 겨우 참깨만 했다. 며칠 해가 좋아서 사흘 만에 싹이 올라왔다. 날듯이 좋아하는 둘째를 보는 내내 무식한 내가 부끄러웠다.


 꽃씨에 싹이 오르는 걸 보면서 혹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경쟁하듯이 중학생도 되기 전에 종합학원에 때려 넣고, 족집게 과외를 시키고, 생각도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논술을 배우게 만드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다 아이들도 내가 버린 꽃씨처럼 까맣게 썩어버릴 것 같았다. 어찌어찌 홀로 싹을 틔운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진 못할 것 같았다. 타인을 같은 인간으로 여길 줄 모르는, 사람과 괴물 그 중간 어디쯤의 변종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요새 티비에는 그런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사실 자녀교육은 부모 각자의 철학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겐 타인의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도, 이유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철학을 가지고 두 딸을 키우는 데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공부 잘하는 아이 아니어도 좋고, 창의력 넘치는 아이 아니어도 좋다. 그냥 제 움틀 자리에서 행복한 꽃을 피우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천 원 주고 산 꽃씨로부터 내가 배운 교육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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