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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y 30. 2023

식당 메뉴판에 엄마가 있었다

 결혼하고 도통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즐겨 먹었던 학교 앞 매운 짜장면이다. 맵부심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는 짜장면집 사장님이 '에이, 매워서 못 먹어' 하는 말에 고무되어(낚여서) 늘 최고치로 맵기를 조절한 짜장면을 먹어왔다. 먹을 땐 땀 한 바께스 흘리면 그냥저냥 클리어가 되는데, 문제는 먹고 난 이후다. 정확하게 6시간 뒤면 뱃속에서 신호가 온다. 이날은 직장과 항문 불구경하는 날이라고 보면 된다.

 아내는 매운 짜장면을 찾아서 먹는 나를 요새말로 극혐했다. 밀가루 음식을, 그것도 맵게 만들어 속 다 버릴 게 뻔한 음식을 왜 먹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말했다. 당신이 나랑 결혼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라고 받아치려다가 한 대 맞을까 봐 참았다.


 아무튼 결혼하고 매운 짜장면은 못 먹는다. 그래도 국수는 끊을 수가 없어서 먹기 시작한 게 막국수다. 요새 사람들은 족발 배달 시키면 곁들이는 검은 빛깔의 비빔국수를 가장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건 사실 오리지날이 아니다. 막국수의 '막'은 이제 막 도착했다 할 때의 그 막이다. 금방 만들어 먹는다고 해서 막국수다. 순수한 메밀가루로 만들면 반죽이 끈기가 없이 뚝뚝 끊어지는데, 그래서 먹기 직전에 금방 눌러 국수를 뽑아야 그나마 형태가 유지된다. 색깔도 검은색이 아니고 허여멀건하다. 검은색을 띠는 국수는 로스팅한 메밀가루나 보릿가루 등을 섞은 것이다. 진또배기는 허여멀건하고 맛없어 보이는 놈이다. 마치 나란 놈처럼 젓가락 들어 입에 넣어 봐야 진가를 안다. 그래서 와이프 말고는 괜찮은 놈인지 잘 모르나 보다.


 아내와 함께 운동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마침 고기도 떨어졌고, 야간에 근무도 들어가야 해서 밖에서 한 끼 간단히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속이 안 좋은데. 하고 아내가 말하면 그건 막국수를 먹자는 신호였다. 밖에서 파는 것 중에 속 편한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가 막국수다.

 막국수 먹지 뭐.

 그래.

 오늘 점심밥은 안 차려도 되겠구나 룰루랄라 손 잡고 찾은 곳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A 막국수 집이었다. 막국수 명인에게서 직접 전수받아 가게를 낸 이곳은, 본고장의 맛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했다. 좁아터진 나라에 여기도 본고장이고 저기도 본고장인 게 조금 이상했다. 여하튼 이곳 막국수는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한 양념에 동치미 육수를 부어 먹는 게 특징이다.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정말 내 입맛과는 동떨어진 맛이다. 내 입에는 예나 지금이나 매운 짜장면이 최고지만 결혼하면 원래 그런 것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 같다. 담백하고 심심한 국수맛에 집중을 못해서 곁눈으로 가게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벽에 붙은 메뉴판이 문득 눈에 띄었다. 특히 메뉴판 한 구석에 실린 이곳 음식의 특징을 설명한 부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순 메밀로 제분해 흰빛을 띠는 면 위에 야채와 양념, 제철과일을 소복하게 올린 대표메뉴인 막국수는...... 더덕, 마늘과 함께 내오는 편육도 별미로 사랑받는다...... 세심한 서비스로 정성을 다한다.


 단어 선정뿐 아니라 과장 없이 덤덤하게 써 내려가는 필치와 글의 호흡도 익숙했다. 사장님은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누구도 모르리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환갑이 넘도록 지역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바빠?

 응, 아들. 괜찮아.

 A 막국수 취재한 적 있지?

 예전에, 거기 생길 때 한 번 취재했지.

 신문도 한 부 보내줬어?

 보내줬지. 왜?

 아, 메뉴판에 엄마가 쓴 글이 보이길래.

 그래?

 사진을 찍어 보내드리자 엄마도 자기가 쓴 글인 것을 알아보았다. 부모가 제 새끼 알아보듯 당연했다. 누군가는 말도 없이 글을 가져다 쓰면 어쩌냐 하고 성을 내겠지만 엄마는 그런 거 없었다. 글이 좋았으니 가져다 쓰겠지 뭐 하는 마음인 것 같았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엄마는 세상에 없고 엄마가 쓴 글만 남을 것이다. 엄마한텐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팔팔해서 이곳저곳에 엄마의 흔적을 더 많이 남겨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세상에 없어도 자식들이 나를 찾을 수 있게끔 앞으로 더 열심히 끼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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