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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n 03. 2023

돈 벌어온다고 유세

 2년 간 부모님 집에 얹혀살다가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둘째 딸이 갓 태어났고, 아내의 우울증은 절정이었다. 일부러 소방서 가까이에 전셋집을 얻었다. 그래도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냥 보통의 구급출동이었다. 지령의 내용은 아이 팔이 빠진 것 같다. 주소지는,


 OO길, OO아파트, 301동 1305호

 OO길, OO아파트, 301동 1305호

 OO길, OO아파트, 301동 1305호

 .

 .

 .

 OO아파트 301동 1305 호면 우리 집인데?

 형네 집이라고요?

 어, 우리 집이야.


 출동하는 내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팔이 빠졌다고? 왜? 뭐 하다가? 아니 뭐 어떻게 하면 애가 팔이 빠지지. 양손을 잡고 만화처럼 빙빙 돌리기라도 했나. 말 안 들어서 잡아끌어다 혼내려다 다친 거 아냐? 내가 그렇게 애 키우면서 성질 죽이라고 얘길 했는데. 그런데 이 새끼는 오늘따라 운전이 왜 이렇게 느려. 점심때 지나지 않았나, 도로에 차는 또 왜 이리 많지. 회사 가서 일 안 하나. 저 할아버지는 구급차에 대고 왜 경례를 하는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 와가나? 다 왔구나. 5분이나 걸렸네.

 형. 운전하는 동생이 입을 뗐다.

 어, 왜.

 화내지 마요, 형.

 화 안 났어.

 얼굴이 화났어요.

 원래 이렇게 생긴 거야.


 집에 들어가니 첫째가 아픈 팔을 다른 팔로 감싸 쥐고 있었다. 만져보니 팔꿈치 관절이 어긋나 있었다. 평소라면 아빠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텐데 고통스러워서 강아지처럼 낑낑댈 뿐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눈물만 찔끔거리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많이 아프니?

 응.

 어쩌다 그랬어.

 잘 모르겠어.

 아내를 보며 물었다. 어쩌다 다친 거야.

 그냥, 손 잡고 같이 방에 들어가다가.

 그런다고 팔이 빠져?

 진짜야.

 병력청취가 아닌 거의 취조를 하는 모양새였다. 화가 났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맘때는 우울증 때문에 자기감정 컨트롤을 못하는 아내가 종종 미워 보였고,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우울이 병이란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구급대에서 한참을 더 일한 뒤에야 우울이 병임을, 사람을 죽음까지도 몰고 가는 병인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때는 그저 속이 끓었다. 나는 정말 화가 나면 말을 하지 않는다. 입을 꾹 닫고 아이를 안고 구급차에 올랐다. 일지를 작성하려면 손이 놀아야 하는데 그냥 안고 있었다. 아이 엄마에게 아이를 안겨주지 않았다.


 응급실엔 마침 소아과 의사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첫째의 팔을 요리조리 살피더니 위팔 뼈와 아래팔 뼈를 살짝 당기며 돌리는 식으로 뼈를 맞추었다. 겨우 몇 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자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팔 뼈 하나 못 맞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정말 출동해서 내가 한 일이라곤 나 근무하는 동안 애들 본다고 애쓴 아내에게 눈을 부라린 것 외엔 없었다. 언젠가 상황이 딱 비슷한 출동을 나갔던 게 떠올랐다. 엄마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아이가 커피포트에 연결된 전선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온몸에 화상을 입은 건이었다. 그걸 두고도 그 엄마에게 안쓰러운 마음이었는데, 정작 내 아내에겐 그러지 못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남녀를 떠나서 바깥일 하는 사람들은 누군가 나 대신 집안일을 해주는 덕에 맘 놓고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다 집 안에서 사건 사고가 생기면, 그게 그 사람의 부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바깥 일하는 사람 대신 집 안에서 혼자 애쓰다 보니 실수가 나오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바깥일 하는 사람이 집안에도 좀 신경을 쓰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자신은 돈 버는 사람이란 유세 탓에 좀처럼 실천으로 이어지진 않는 방법이다.

 

 집 바깥은 전쟁이라고? 애 키우는 집 안은 지옥이다. 심지어 무급이다. 회사 쉬는 날 집안일 하루만 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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