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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l 05. 2023

뜨거운 비가 와

 얼죽아란 말이 유행했더란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줄임말로, 한겨울에도 얼음 띄운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한 발만 디디면 몸을 덥힐 곳이 지천에 널렸으니 이 또한 풍요로운 문명이 낳은 호사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지 않는다. 커피는 디죽뜨다. 디어 죽어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찾는 건 후후 불어서 한 김씩 식혀가며 마셔야 제대로 커피맛이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내가 변태라서 그럴 수도 있다. 여하튼 사철 커피는 뜨겁게 마셔야 한다는 지론이 어제는 무너졌다.


 팔을 다친 환자를 싣고 가는 동안 보호자는 내내 구시렁거렸다.

 구급차가 왜 이렇게 느려요, 사이렌 켜고 달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급한 환자 실었을 때만 빨리 갑니다.

 병원에 도착해서도 불평은 이어졌다.

 아직 접수가 안 됐나요?

 접수는 했습니다.

 그런데 왜 못 들어가나요?

 응급실은 급한 환자 순으로 받아주거든요.

 구급차 타고 와도요?

 네. 구급차 타고 와도요.

 그냥 내 차로 올 걸.


 환자 인계를 마치고 대학병원 앞 카페에서 샷을 두 번이나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빨대로 먹었지만 다 마시는 데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골이 징징징 울렸다.  잇따라 구급대 전용 휴대전화도 징징징 울렸다. 상황실에서 온 전화였다. 반장님, 출동 가능하신가요? 네, 방금 인계 마쳤어요. 지령 넣을게요. 네.


 시험관으로 어렵게 가진 아이였다. 임신 8주 차였다. 여자는 하혈이 멈추지 않아서 신고를 했다. 보호자로 따라나선 남편은 너무 흥분해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애먼 부인의 팔만 주물러댔다. 혈압이 점점 떨어졌다. 구급차 처치실 내에 비릿한 내음이 가득 찼다. 급한 상황이었다.

 

 신호도 없고, 차선도 없다. 운전하는 이나 처치하는 이나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서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의 말단이 저릿저릿해진다. 머리 바로 위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이명이 겹쳐 들리기 시작한다. 삐이이이이이이이. 표정은 침착함을 가장하지만 심장은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다. 액셀을 풀로 밟았다가 다시 브레이크를 밟으며 기우뚱 코너링을 하는 구급차 엔진도 왕왕왕 비명을 지른다. 목숨 걸고 목숨을 구하는 질주.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되는 우리들의 달리기.

 

 나 계속 배가 아파. 환자분류소에서 간호사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가 말했다.

 그래? 아까보다 더 아파?

 피가 계속 나와.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애써 나쁜 마음을 떨치려는 듯 소리 없이 울음을 목 뒤로 넘겼다. 눈물과 침이 한꺼번에 여자의 목울대를 엎치고 뒤치며 지나갔다. 그건 남자인 나의 두뇌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었다. 제 뱃속에 또 다른 자신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한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무엇이었다. 눈앞의 모든 게 까마득해서 숨이 막혔다.


 바깥으로 나오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른 무더위에 내내 입을 벌리고 있던 아스팔트가 물을 먹고 비릿한 한숨을 쉬었다. 병원 앞뜰에 제멋대로 자란 개망초 무더기는 하얗고 노란 옷을 입은 아이들처럼 빗속을 뛰놀았다. 빗방울은 뜨거웠다. 타는 해를 삼킨 비가 오후 내내 뜨겁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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