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Aug 26. 2023

내가 없을 때 싸우기

 여자는 머리부터 쇄골 아래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들춰보니 오른쪽 귀 위쪽으로 길게 벌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식염수를 부어서 상처를 세척하고 지혈을 했다. 피는 금세 멎었다. 어쩌다 다치셨나요. 곁에 있던 그녀의 중학생 딸이 핸드폰으로 찍어둔 동영상을 보여줬다.


 머리가 허옇게 센 남자가 여자를 밀친다. 여자가 쓰러지면서 식탁 옆 구석자리로 처박힌다. 득달같이 달려온 남자가 위에 올라타서 그녀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돈이 어쩌고 월급이 어쩌고 씹어 뱉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옆에서 소리치는 딸의 목소리도 들린다. 화면이 흔들린다. 남자가 유리로 된 맥주잔을 손에 들자 화면이 한 바퀴 휭 돌더니 추락한다. 수 초간 천정의 조명만 멀뚱히 비춘다.


 병원 갈 준비 하세요.

 나중에 제가 알아서 갈게요. 저 인간만 데려가 주세요.

 가셔야 돼요. 상처가 깊어요.

 꼭 가야 되나요.

 네. 따님도 같이 가게 준비하세요.


 자리를 벗어난들 마음의 지옥이야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몸의 지옥이나마 벗어난다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었다. 병원 안 데려가면 귀소 해서 내내 마음이 불편할 거란 이유도 한몫했다. 그래서 안 간다는 걸 굳이 나가자고 부추겼다.

 여자와 딸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간 동안 우리는 거실에 남았다. 식탁엔 먹다 남은 두 사람 몫의 저녁상이, TV 앞엔 뒤집힌 밥상이 있었고, 그 옆으로 술병과 안주로 낸 음식이 범벅이 되어 뒹굴었다. 여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TV를 보며 술을 들이켜는 남자의 모습, 그 상태로 말다툼이 생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 아내에게 주먹질하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거실 벽 조명 스위치가 몰려있는 부근에 A4 용지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검정 크레파스로 꾹꾹 눌러쓴 글이었다. 지금은 중학생인 딸이 한참 어렸을 때 쓴 걸로 보였다.


 첫째, 내가 없을 때 싸우기

 둘째, 서로에게 惡(악)하지 않기

 셋째, ......

 넷째, ......

 다섯째, 서로가 이해되지 않을 때는 서로 말하지 않기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이 남자를 불러 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옷을 갈아입은 두 여자를 데리고 집을 나서려는데, 현관문 바로 옆 냉장고에 빼곡하게 붙은 배달음식점 스티커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이 집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을 모아둔 듯했다.


 도착한 병원은 감염 관리 차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함께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덕분에 여자가 병실에 들어간 뒤로 딸아이는 혼자였다. 딸은 울다가, 밖으로 나가서 울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함께 출동한 구급대원이 귀소 하기 전에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들고 왔다. 차에 타려다가 울고 있던 학생에게 하나를 건넸다. 같은 여자인 게 저럴 땐 좀 편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까이 가진 못하고 속으로만 기도했다. 기도가 저 위에 닿아서 비와 함께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리 맞고 피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