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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an 09. 2023

서리 맞고 피어도

 그녀는 지쳐서 잠시 쉬듯 욕조 모서리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길고 하얀 목 주변에 샤워 호스가 몇 바퀴 감겨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따뜻한 물을 맞고 있었는지 속옷만 걸친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호스를 걷어내고 그녀를 욕실 바깥으로 끌어내 바닥에 뉘었다. 대여섯 정도로 뵈는 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애 좀 데리고 나가 주세요! 대원 중 하나가 외쳤다.


 경동맥과 넙다리 동맥을 짚었다. 맥은 없었다. 제세동기 패치를 붙이자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리듬이 보였다. 심장의 박동 없이 전기 신호만 관찰 가능한 상태, PEA(Pulseless Electrical Activity:무맥성전기활동)였다. 주변의 손들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숨길에 기다란 관을 꽂아 산소를 밀어 넣고 동시에 정맥로를 찾아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약물을 주사했다. 얼마 전 센터에 보급된 루카스(LUCAS:자동심폐소생기)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심폐소생술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잡아먹는 가슴압박을 배터리에 의해 움직이는 실리콘 흡착판이 정확하고 꾸준하게 수행했다.


 잠깐 멈춰 봐, 리듬 있는 것 같아.


 다시 목과 허벅다리의 동맥을 짚었다. 느리고 미약하긴 했지만 움직임이 느껴졌다. 약물을 주사하고 일시적으로 심장이 정신을 차린 것일 수도 있으나 어쨌거나 긍정적인 신호였다. 현장에서는 뭐든 소리치고 움직여야 좋다. 아직 생명이 육체에 붙들려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ROSC(자발순환회복) 됐어요! 빨리 갈게요.


 엘리베이터가 지독하게 좁았다. 주 들것을 의자형태로 만들어 환자를 앉히고, 자동 제세동기와 휴대용 산소 가방을 싣고 나니 사람이 탈 자리가 모자랐다. 어쩔 수 없이 대원 둘만 따라붙고 나머지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저승사자가 함께 올라타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여자의 목엔 아직 샤워호스가 감겨 있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부러 눈을 피해 계기판을 쳐다보았다. 붉은 숫자가 1을 향해 줄어드는 속도가 유난히 느리게 느껴졌다.


 흔한 일이었다. 남편은 매일 돈 벌러 나가고, 그녀는 어린아이를 도맡아 키웠다. 오래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함께 살던 시부모님이 그 우울에 한몫했는지, 아니면 육아를 분담해 주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울증의 특성상 한달음에 죽음을 향해 달려가진 않고 아마도 천천히 그 외롭고도 질척한 길을 갔을 텐데, 가족 중 누구 하나 그녀의 발걸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주쯤 지나 다른 환자를 병원에 인계하며 근무 중이던 간호사에게 그녀의 소식을 물었다. Expire(사망)했어요. 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목맴 환자는 뇌가 먼저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에 대부분 예후가 좋지 않다. 죽거나, 운이 좋아야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는 식물인간이 된다. 흔한 일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친 다음 날 아침, 현관문을 열었지만 반기는 목소리가 없었다. 거실 가득 널브러진 장난감, 식탁 위아래로 먹다 흘린 음식 부스러기, 내팽개쳐진 옷가지, 아침에 유치원 보낸다고 부랴부랴 머리 묶이느라 쏟아진 고무줄과 머리핀. 어젯밤과 오늘 아침이 얼마나 전쟁 같았는가를 보여주는 흔적들만 가득했다. 여보.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들 방에도, 안방에도 아내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 긴장할 이유가 없는데 자꾸 긴장이 되었다. 안방에 이어진 화장실 문을 열었다. 샤워 부스 안 쪽에서 아내가 몸을 씻고 있었다.

 여보.

 깜짝이야! 왜? 아내가 부스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냐. 대답하자, 별 실없는 사람 다 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이마 위 쪽으로 희끗희끗한 새치들이 보였다. 전에 없던 것들인지 생긴 지는 좀 되었는데 내가 몰랐던 것인지 헷갈렸다.

 당신 흰머리가 꽤 많네?

 나도 알아요. 문이나 닫아 주세요.

 별일 아니라는 듯 씩씩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쓰였다. 둘째가 태어나면서 아내에게도 다른 많은 엄마들처럼 우울증이 찾아왔었다. 그때의 난 바깥에서 돈 벌고 온 게 대수인 양 집구석이 어지럽다는 둥, 당신이 솔직히 힘들 일이 뭐 있냐는 둥, 내가 더 피곤하다는 둥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소리 없이 터지는 아내의 울음을 몇 차례 마주한 뒤에야 잘못을 깨달았다. 배려 없고 잔인했던 시간을 무슨 힘으로 버틴 것인지, 미안하고 고맙고 그런 마음이 들어서 멋쩍게 웃어 보였다. 웃지만 말고 문을 닫아 주시라고요, 추워. 핀잔을 주는 모습이 그래도 밉지 않고 예뻤다.


 잎새가 다 희도록 서리를 맞아도 꽃은 꽃이다. 하물며 내 집에 핀 꽃이다. 다정하게 대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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