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Sep 04. 2023

목욕탕 스케치

 오랜만에 처가에 갔다. 처제, 제부, 아내랑 넷이서 가볍게 한 잔 했는데, 그 탓인지 새벽같이 잠을 깼다. 눈을 뜨니 먼저 일어난 아내가 식탁에 앉아서 얼굴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처제 내외는 한참 꿈결이었다. 젊은 게 좋긴 좋았다. 문득 좀 걷고 싶어서 아내에게 물었다.

 나 목욕탕 다녀와도 돼?

 그러든가.

 같이 안 갈래?

 코로나 때문에 싫어.

 생각해 보니 코로나 터지고 근 2년은 공중목욕탕에 간 일이 없었다. 난 원래 스트레스받으면 담배를 태우는 대신 목욕탕에 가는 사람이었다. 데일 듯한 열탕에 들어갔다가 차디찬 냉탕에 뛰어들면 전신의 모세혈관이 늘어났다 쪼그라드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듯 냉탕과 열탕 사이에는 자유가 있었다.


 전날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아침 6시가 다 되어도 거리에 북적이는 가겟집들이 보였다. 24시 해장국, 순댓국, 설렁탕 뭐 그런 곳들이었다. 저렇게 아침부터 한 잔 기울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따끈한 국물을 앞에 두고 그걸 안주 삼아, 또 친구 삼아 느긋하게 소주 한 병 비우는 상상을 했다. 정신 차려 이 양반아. 귓가에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까드득. 머릿속에서 두 병째 병뚜껑을 따려다가 멈췄다. 아 한참 좋았는데.


 목욕탕 라커는 전자식이었다. 키에 쓰인 숫자대로 라커를 찾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관리인 아저씨께 말했다. 이거 키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별 촌놈을 다 보겠다는 듯 카운터의 체크인 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찍고 들어가셔야지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느리게 걷는 건가. 목욕탕 입구에서도 어딘지 눈치가 보여 잠깐 멈췄다. 유리문 안쪽을 보니 다들 벌거벗고 있었다. 다행히 그건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온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목욕탕에서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옷을 벗고 다들 자유함을 느끼는 까닭인지 생각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냉탕 안쪽 계단에서 난간을 붙잡고 위아래로 스텝을 밟으며 운동하는 사람, 물기를 닦으라고 비치한 수건을 때수건처럼 쓰는 사람, 다 젖은 KF94 마스크를 쓴 채 열탕에 들어가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 수면용 선배드에 누워 중요 부위만 수건으로 가리고 잠든 사람. 그렇게 구경하다 보면 머릿속의 생각이 지워지고 멍한 상태가 된다. 눈은 뜨고 있는데, 어딘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스물아홉, 서른.

 

 심폐소생술을 하는 손 아래서 오도독오도독 가슴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심전도를 분석하기 위해 노인의 몸에 제세동기 패치를 붙였다. 모니터 리듬은 바람 없는 날 수평선 보다 잔잔했다. 온탕에서 막 건져 올린 몸이 산 사람처럼 따뜻했다. 노인의 얼굴은 죽음의 순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되려 평화로웠다. 그래서 절대 살릴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직감했다.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와 다름없이 냉랭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땀을 실컷 뺀 뒤라 몸이 가벼웠다. 이만하면 여전히 무거운 오늘도 잘 견뎌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국밥의 온도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