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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18. 2023

시간여행자를 만났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기억하는가. 핵전쟁으로 전 세계가 혼돈에 빠진 미래. 고도로 진화한 인공지능은 지구상에서 인류를 박멸하기 위해 기계군단을 만들어 낸다. 인공지능은 인류 저항군의 대장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를 살해할 목적으로 T-800이란 이름의 사이보그를 과거로 보낸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38대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영화 내에서 사이보그로 활약했다. 온몸이 근육 덩어리인 알몸의 남자가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포즈로 번개 폭풍을 뚫고 등장하는 장면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패러디가 될 만큼 유명하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T-800을 연상시키는 남자들이 있다.


 팬티만 입은 두 남자가 베란다에 갇혀 있다. 간이 테이블과 의자, 그 위에 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가 보인다. 함께 사는 두 사람이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다가 자동으로 닫히는 창문 덕에 밖에 갇혀버린 듯하다. 나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잠시 고민한다. 저들을 구해주는 게 맞을까. 요즘 누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대놓고 담배를 태우나. 암만해도 저들이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핵전쟁으로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실내 흡연 정도야 아무런 죄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맨손으로 창문을 깨고 들어와도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진 몸은 상처 하나 입지 않겠지만 아직 정체를 밝힐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잠자코 119에 신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분간 인류를 위협할 가능성은 적다고 볼 수 있다. 조심스레 베란다 쪽으로 다가간다. 안쪽에서만 열리는 창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한다. 팬티 차림의 사이보그들이 오소소 몸을 떨며 집 안으로 들어온다. 온도 감지 센서도 굉장히 예민한 모양이다. 역시 미래기술이다.


 아프신 데는 없지요. 묻지만 저들이 보통 사람처럼 아픔을 느끼지 못할 거란 걸 잘 안다. 단언컨대 타인의 아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아파트 베란다에서 담배 태울 생각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픈 데 없어요. 역시,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두 남자가 사는 집을 빠져나온다. 너 때문에 뭔 지랄이야 이게! 닫힌 현관문 안쪽에서 서로 욕지거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둘이 싸우는 덕에 인류의 멸망 시기는 조금 뒤로 미뤄질 듯하다.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들은 이미 21세기 지구 곳곳에 침투해 있다. 베란다에서 담배 태우는 사람, 자식을 두들겨 패는 부모 혹은 그 반대, 길 가던 사람 머리에 돌려차기를 날리는 놈, 국민을 사지로 내모는 지도자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머잖아 벌거벗은 시간여행자들의 차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지 출처: 저작권이 무서워서 직접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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