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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21. 2023

눈썹칼

 여학생과 아버지가 아파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은 올해 스무 살이라고 했다. 학생의 왼쪽 팔목을 아버지가 수건으로 누르고 있었다. 구급차에 두 사람을 싣고 상처를 살폈다. 손바닥 바로 아래로 길게 칼자국이 나 있었다. 인대가 끊어지고 피부 아래 지방층이 뒤집혀 밖으로 밀려 나올 만큼 상처가 깊었다. 상처의 방향이 조금만 틀어졌어도 동맥을 끊어먹었을 게 분명했다. 이거 뭐로 하신 거예요. 학생에게 물었다. 눈썹칼이요. 아버지 얼굴을 잠깐 봤는데 세상 어디에 저런 얼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담했다. 나라도 그럴 것 같았다.




 첫째를 산후조리원에서 처음 데리고 나온 날. 그때는 세상 모든 게 적이었다. 지나가는 사람, 불어오는 바람, 아이를 안고 있는 내 투박한 손까지. 온통 못 미더운 것뿐이었다. 이렇게 귀한 것이 내 삶으로 헤엄쳐 들어와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아이를 안고 집에 어떻게 왔는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행복감과 불안감으로 만취해 인사불성이었다.

 

 아이가 돌을 넘겼을 때 처음 수목원에 데리고 갔다. 꽃이고 뭐고 내 온 신경은 유모차를 끄는 양손에 쏠려 있었다. 꽃구경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 곁에서 함께 걷는 큰 꽃도 있었고, 이제 막 피어나 유모차에 실린 작은 꽃도 있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혹 시들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서둘러 구경을 마치고 카시트에 아이를 앉혔다. 벌써 곤히 잠든 아이를 보니 긴장이 풀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날 유모차를 수목원에 버리고 왔다.


 한 번은 아이가 크게 감기몸살을 앓았다. 근육통이 심해서 일어나 걷지를 못했다. 어디 나가지는 못하고 이불에 파묻혀 태블릿으로 하루 종일 만화영화만 봤다. 닭죽을 묽게 끓여 주면 겨우 몇 수저 먹다가 말았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아이가 앓는 것의 배가 될 만큼 앓아도 좋으니 아픈 걸 나에게 옮겨달란 기도를 했다.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아이에겐 제 몫의 삶이 있고, 그러므로 제가 견뎌야 할 고통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의 머리가 조금 커진 요즘, 나는 종종 네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이 끊임없이 아이에게 달콤한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너는 특별하다고, 천재라고, 타인보다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평범한 삶에 뒤따르는 아픔과 고민 대신 높은 집과 반짝이는 구두와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사랑이 주어져야 한다는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짓을 곧이곧대로 믿고 자란 아이는 삶과 거짓의 괴리에 하루하루 절망하며 안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러다 결국 눈썹칼에도 잘려나가는 실 같은 목숨줄을 쥐고 살게 될지 모른다.


 아이가 충분히 아팠으면 좋겠다. 제 힘으로 그걸 견뎌내는 게 보통의 삶이고, 진실한 삶인 것을 깨닫는다면 좋겠다. 내가 아이의 발아래서 넘어져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땅이 되어준다면 고통을 견디는 일이 조금은 수월할 것이다. 그렇게 알뜰주걱으로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남김 없이 삶을 살아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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