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Sep 22. 2023

K-정의의 이름으로

 새벽 2시. 아파트 입구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구경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이고, 그다음이 싸움 구경이었다. 사람들은 쌈박질하는 두 남자를 구경하고 있었다. 둘 다 덩치가 좋았고,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한 남자가 웃통을 벗어젖혔다. 몸통을 온통 감싸는 용문신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 뒤엉켜 주먹질을 하는 동안 문신을 한 사람이 휠체어에서 떨어졌다. 분노에 눈이 뒤집혀 주먹을 휘둘렀지만 마른오징어처럼 쪼그라든 다리 때문에 상대방에게 닿지 않았다. 휠체어 위에 버티고 있던 다른 남자의 주먹이 허공에서 붕붕 댔다. 죽일 듯이 서로에게 욕지거릴 퍼붓는 모습이 되려 짠했다. 갑자기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20대 때였다. 수지와 혜리가 있었다. 나는 수지와 먼저 사귀다 헤어진 뒤에 혜리를 만났다. 수지는 나와 혜리가 만나는 게 잘못되었다는 이야길 했다. 혜리가 수지의 친한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나도 어려서 아, 이게 어딘가 인도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구나 하고 수긍이 되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연애를 했다. 혜리는 그런 맘을 가지는 나도 잘못이고 지나간 사람이 아쉬워 전화로, 문자로 연락을 하는 수지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도 이해가 되었다. 두 여자는 종종 수화기 너머로 침을 뱉어가며 무섭게 싸웠다.


 혜리의 감정은 어딘지 광적인 데가 있었다. 사랑이라기 보단 집착에 가까웠다. 내 주변의 모든 여자를 의심했고, 자신을 두고 내가 따로 시간을 보내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나는 이때 재즈피아노를 배워보겠노라 나름 원대한 꿈을 꾸고 서울로 상경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하루 한 시간도 제대로 연습을 못했다. 레슨비를 벌기 위해 하루 10시간 꼬박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은 혜리와 술을 퍼먹는 데 썼다. 그렇게 이 년이 지났을 때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꿈도 사라졌다. 혜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늦은 밤 전화통화로 죽어버리겠노라 실시간 생중계를 하는 혜리의 집을 찾아갔고,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었고, 잠긴 문을 열기 위해 119를 불렀다. 속옷 바람으로 술에 취한 그녀가 침대 위에 잠들어 있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지쳐있던 내게 수지가 연락을 했다. 자긴 내가 어떤 꿈을 꾸더라도 응원해 줄 자신이 있노라 말했다. 그런 그녀가 고마워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얼마 후 나는 허리병이 도져 디스크 수술을 받느라 병원 신세를 졌다. 꼼짝없이 누워 있던 내게 수지가 찾아와 이별을 고했다. 당사자가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완벽한 마무리였다.


 두 여자의 다툼이 나를 사랑해서 벌어진 거란 착각을 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그건 각자의 정의를 위한 싸움이었다. 상대방은 틀리고 나는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싸움. 혜리가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날개를 펴기 위한 나의 몸부림을 응원해 주었을 것이고, 수지가 정말 나를 사랑했다면 굳이 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나를 찾아와 결혼할 사람이 생겼노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싸움에서 어떤 진정성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건 중간에 끼어 있던 나를 비롯해서 실로 절름발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애타는 몸부림이었을 뿐이다.


 오늘도 인터넷으로, 티브이로 국민을 위해 싸운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그런 와중에 나는 택시 미터기보다 빠르게 오르는 기름값이 걱정이다. 소주 한 병을 편의점에서 2천 원에 파는 게 걱정이다. 대낮에 여자를 때려눕혀 욕망의 도구로 쓰는 미치광이들이 걱정이고, 초등학교 교사들이 줄지어 목숨을 끊는 게 걱정이다. 적막한 금요일 밤, 번화가의 누런 불빛 아래 누렇게 떠서 담배만 주야장천 태우는 사장님들의 얼굴도 걱정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내 가족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삶을 누릴 수 있을까가 가장 걱정이다. 시즌이 돌아올 때마다 분명 정의의 이름으로 이 나라를 바로잡겠노라 떠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런 이들은 하나 같이 절름발이다. 그러니 주먹질은 관두고 서로 부축해서 한 걸음이라도 제대로 걸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썹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