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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26. 2023

칼을 쥔 아이

 일곱 살 때부터 검도를 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공영 체육관에서 매일 아침 7시에 검도 교실이 열렸다. 엄마는 체육관 지하의 수영장에서 아침 수영을 했다. 한 시간가량 운동하고 나면 몹시 허기가 져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엄마 손을 잡고 체육관 옆 매점을 찾았다. 김밥이니 컵라면이니를 종종 사 먹은 기억이 있다. 아마 그래서 어렸을 때 운동을 하면 할수록 통통해졌던 모양이다.


 검도는 다른 운동과 다르다.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은 태권도의, 복싱을 배우는 사람은 복싱의 특장점을 이야기하겠지만 검도가 이들과 특별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바로 칼을 쓴다는 것이다. 그래봐야 대나무로 만든 죽도, 혹은 통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이지만 칼은 칼이기 때문에 엄격한 규칙을 따라 사용해야 한다.

 칼을 쓰지 않을 때엔 왼손으로 손잡이 바로 아래를 쥐고 날이 뒤를 향하도록 한 뒤 허리춤에 찬다. 칼을 뽑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함부로 허리춤에서 칼을 뽑지 않는다. 야구배트처럼 바닥에 죽도 끄트머리를 질질 끌고 다니다가 사범님께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기억이 있다.

 대련을 하기 위해 서로 칼을 겨눌 때에도 절차가 있다. 어느 나라의 정치판처럼 등 뒤에서 칼을 뽑는다던가, 몰래 먼저 뽑는다던가, 뽑는 척하면서 칼을 집어던지지 않는다. 대련에 앞서 두 사람은 먼저 정중히 목례를 한 뒤 칼끝과 칼끝이 주먹 하나 정도 되는 거리에서 칼을 뽑는다. 그럼 비로소 대련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 칼을 부딪는 와중에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있다. 타격이 허용되는 부위는 머리, 손목, 허리로 한정하며 숙달된 이들에 한하여 목 찌르기도 허용된다. 호구를 차고 죽도를 사용하는 대련이지만 진검을 쓰는 것과 진배없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이야말로 검도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검을 쥔 사람의 길(검도)을 추구하는 무예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이가 칼을 들고 있다. 지령서에 쓰인 내용이었다. 현장은 지어진 지 오래지 않은 깨끗한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열자 도배를 새로 한 집 특유의 냄새가 났다. 경찰이 먼저 도착해서 아이와 엄마를 떼어 놓은 뒤였다. 칼을 들고 있던 아이는 겨우 열세 살이었는데 덩치가 보통 어른만 했다. 엄마 쪽도 체격이 좋았다. 각진 턱선과 부리부리한 눈매가 발할라의 전사를 연상시켰다. 엄마가 먼저 때렸어요.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말 안 듣는 아이를 쥐어박았고, 아이가 대들었고, 화난 엄마가 아이를 거실 구석으로 밀쳤다. 힘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던 아이는 결국 부엌에서 식칼을 찾아 손에 쥐었다. 엄마가 먼저 때렸어요. 아이는 연신 그 말을 웅얼거리며 뚝뚝 눈물을 흘렸다. 덩치만 컸지 영락없는 열세 살이었다.


 아이가 올바르게 칼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그런 걸 부모가 가르치기 쉽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칼을 쥔 사람들이 제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겁박하고, 칼로써 얻어낸 이득을 지키기 위해 또 서슴없이 칼을 휘두른다. 큰 칼을 가진 이들이 먼저 불법과 패륜을 저지르며 제 배를 불린다. 그래서 탁한 윗물이 아랫물로 이어지듯 자연스럽게 작은 칼을 가진 사람들도 그보다 약한 이들의 껍질을 칼로 벗겨낸다. 이 시대의 부모가 아이에게 진정한 의미의 정의, 칼을 올바른 곳에 쓰는 정의를 가르치기 어려운 이유다.


 칼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은 검도를 배워야 한다. 칼에 취해 망나니처럼 칼춤을 추길 멈추고 칼을 쥔 이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아가 오늘날의 칼이 사람을 베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대접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깨닫는다면 비로소 이 땅의 내일도 기대할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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