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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28. 2023

천국이 된 남자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내 바지 호주머니엔 용돈으로 받은 5천 원짜리 지폐가 하나 있었다. 잔뜩 부푼 마음으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엔 책방에서 만화책 한 권 빌리는 데에 3백 원이었다. 그래서 만화책을 열 권쯤 빌리고, 남은 돈으로 5백 원짜리 과자 네 봉지를 사서 만화책 보는 내내 집어 먹을 작정이었다. 이불에 엎드려 양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보거나, 벽에 기대어 무릎을 구부린 채로 만화책을 볼 작정이었다. 과자 부스러기가 만화책에 묻으면 미안하니 옆에 물티슈도 갖다 놓고 한 세 시간쯤 나만의 천국을 누리리라. 그런 생각이었다.


 야야, 앞에 봐.


 위협하는 목소리. 뒤에서 다가온 덩치 큰 중학생 형아 둘이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교복에서 담배 절은 냄새가 났고, 입에서는 우리 집 정화조 뚜껑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가 났다. 우리 아버지도 담배를 태웠지만 이를 잘 닦아서 이렇게 지독한 냄새를 풍긴 적은 없었다. 돈 달라는 말을 내일 갚을 테니 돈 좀 빌려달란 식으로 어렵게 어렵게 돌려 말했다. 말할 때마다 입에서 썩은 내가 나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만화책도, 과자도 필요 없으니 어서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형아들에게 오천 원짜리를 줬다. 더 없어? 그게 다예요. 얼굴도 모르는 형아들은 어깨동무를 풀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어쩌다 한 쌍의 바퀴벌레란 말을 쓰거나 들을 일이 있으면 늘 그 형아들이 떠올랐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파트 입구에 남자가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았다. 주택공사에서 임대를 주는 낡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남자는 차가 드나드는 좁은 입구 왼편에 모로 누워있었다. 시커먼 옷을 입은 데다 입구의 조명도 시원치 않아서 처음엔 거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남자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수세미처럼 뭉친 짧은 머리에서 비듬이 우수수 떨어졌다. 눈은 마당에서 키우는 개들 마냥 눈곱이 잔뜩 끼었고, 콧수염은 아무렇게나 붙어 자란 이끼처럼 어수선했다. 어디서 얻어맞았는지 잔뜩 부푼 입에서 침과 피가 뒤섞여 아래로 뚝뚝 듣었다. 남자의 복장뼈에 주먹을 대고 세게 문질렀다. 남자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기운이 없었다. 다시 세게 문지르며 물었다.

 댁이 어디세요.

 왜. 아파. 아파.

 모셔다 드릴게요. 댁이 어디세요.

 818호.

 818호요?

 어.

 

 남자를 부축해서 집까지 갔다. 전자식 도어록이 달려있어서 혹 번호를 잊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억이 나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이 두어 번 빗나가긴 했지만 결국 제대로 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렸다.  현관의 센서등이 희끄무레하게 남자의 집 안을 비췄다. 집에선 남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같은 냄새가 났다. 젓갈이 썩는 냄새. 물에 젖은 담배꽁초 냄새. 씻지 않은 몸에서 풍기는 아찔한 비린내. 남자가 신고 있던 고무장화를 벗는 동안 쓰러지지 않게 부축했다. 발에 뭐가 자꾸 밟혀서 어쩔 수 없이 신발을 신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불을 켰다. 정체불명의 음식이 밥그릇에 담겨 썩어가고, 플라스틱 화분에는 담배꽁초가 선인장모양으로 꽂혀 있었다. 어떤 맘 좋은 사람이 가져다준 김치가 손도 대지 않은 채 통째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위에 갈색의 작은 점들이 빼곡하게 올라붙어 있었다. 남자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 걸음을 옮기자, 갈색 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떤 것들은 썩은 옷가지 사이로, 어떤 것들은 티브이 아래로 숨었고, 몇몇 대담한 놈들은 벽채로 올라가 붙어 주황색 옷을 입은 이방인들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남자를 침대에 눕혔다.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불을 끄려다가 그대로 켜고 나왔다. 불을 끄면 남자가 그대로 어둠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이튿날 다른 팀과 교대하면서 818호 남자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남자는 수년 전에 홀로 탈북을 했단다. 두고 온 가족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원래 살던 곳보다 여기가 더 살만한지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건 천국을 찾아 도망한 남자가 다른 의미에서 천국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낡고 병든 육체가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는 날, 남자는 스스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어 세세토록 갈색 점들의 배를 불릴 것이었다.







 한가위입니다. 맛있는 음식 많이 드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이어트는 며칠 내려놓고, 가족들과의 해묵은 감정도 내려놓으면 더 좋겠습니다. 저의 미문에 응원을 보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일인칭소방관시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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