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Oct 02. 2023

잘 지내죠? 나는 잘 지내요.

 추석 맞아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온 식구가 모였다. 각자 집에서 음식을 조금씩 만들어 와서 그걸로 상차림을 했다. 매번 그런 것처럼 식사를 마친 뒤 커피 한 잔 마시고 정오가 되기 전에 각자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정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하기 시작한 덕에 명절 스트레스는 덜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서 묵은 얘기를 오래도록 나누다 보면 으레 오해가 생기기 때문에, 차라리 밥 먹고 잘 지내시라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게 낫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명절 아닐 때 찾아가면 된다. 그럴 정성이 없는 사람들만 좋은 날 굳이 흰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다.


 추석 당일 야간근무가 걸렸다.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가족 간의 불화가 원인이 되는 신고가 많으리라 생각했다. 음식 준비로 지친 아내와 명절을 기회로 술을 진탕 마신 남편의 말다툼, 결혼해라 취업해라 알아서 할 것을 굳이 입을 떼어 일어나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싸움, 이 땅이 왜 네 땅이냐 이 집이 왜 네 집이냐를 두고 남편들과 아내들이 쌍을 이루어 벌이는 단체전. 개중에는 주먹다짐으로 시작해 칼부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고, 감정이 격해지다 못해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요번 추석은 달랐다.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네댓 차례 출동을 나가는 동안 외상처치 가방을 꺼낸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혼자 사는 노인의 집으로 첫 출동을 나갔다. 요즘은 소방서에서 독거노인들을 위해 집에 긴급구조요청 단말기를 설치한다. 단말기를 통해 구조요청이 들어왔으니 집에 가서 신변을 확인하라는 지령이었다. 노인의 집은 구도심의 골목길 안 쪽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급차를 그 앞에 세우는데 골목으로 낡은 자전거 한 대가 들어섰다. 짧은 백발에 침울한 표정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자전거 손잡이엔 두부가 담긴 하늘색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노인이 물었다.

 박정수 어르신?

 네, 맞는데요.

 소방서로 구조요청이 들어와서 나왔습니다.

 아, 그거요? 잘못 눌렀어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나요.

 없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흰 들어가 보겠습니다.

 노인은 한 결 밝아진 얼굴로 돌아가는 우리를 마중했다. 손까지 흔들며 배웅하는 모습이 꼭 명절 맞아 집에 찾아온 손주들을 떠나보내는 것 같았다.


 새벽 3시쯤엔 조카가 무사히 잘 있는가 확인해 달라는 신고를 받았다. 해서 타 시도에서 걸려온 전환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바로 옆 동네 사는 삼촌이 신고를 한 거였다. 제 차 타고 가보면 될 일이지. 맘 속으로만 뇌었다. 신고자에게 전화를 거니 수화기 너머로 술 냄새가 풍길 만큼 만취한 상태였다. 택시가 없거나, 택시비가 아깝거나, 직접 가서 조카의 생사를 확인할 만큼의 애정이 없거나 셋 중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신고자가 얘기한 조카의 집을 찾았다. 문을 두드리자 부스스한 얼굴의 청년이 우리를 맞았다. 무슨 일이세요. 삼촌이 잘 있나 봐 달라고 신고하셨어요. 아, 네, 괜찮아요. 문이 닫혔다. 신고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동틀 무렵 요양원으로 이날의 마지막 출동을 나갔다. 갓 일흔을 넘긴 남자였고, 밤새 구토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남자는 몇 년 전에 풍을 맞아서 왼쪽 팔다리를 쓰지 못했다. 남자를 들것에 실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 입구에서 남자의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실린 들것을 보자마자 말없이 곁으로 다가왔다. 남편 요양원 보내고 저는 혼자 살아요. 묻지도 않았는데 핑계를 대듯 주워섬겼다. 남자가 멀쩡한 한 손을 내밀었다. 부인은 부러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남편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세 개의 손이 넘실대며 온기가 닿지 않은 부분을 찾아 구석구석 매만졌다. 어디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 지내죠?

 나는 잘 지내요.




매거진의 이전글 천국이 된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