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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Oct 06. 2023

풍화(風化)

 바닥이 차다. 뭘 엎었는지 카펫 한쪽이 다 젖었다. 집구석이 엉망진창인데 하나 치우는 사람이 없다.


 여보.


 불러보지만 답이 없다. 이건 그냥 습관이다. 마누라는 재작년에 죽었다. 별 도리가 없으니 내가 직접 치워야 한다. 삐리릭.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때마침 반가운 얼굴이 나타난다. 아부지. 하고 부르는 이놈은 셋째다. 다른 자식들은 다 서울로 떠났는데 이놈만 미련하게 제 부모 곁에 남았다. 마누라 죽고 혼자 사는 노인네가 걱정된다며 매일 저렇게 얼굴을 디민다. 못난 놈. 셋째 며느리도 못나긴 매한가지다. 순해빠진 거 빼면 칭찬할 구석이 없다. 인물이 좋은 것도 아니고, 돈을 잘 벌어오는 것도 아니다. 똑 부러지게 살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제 남편이랑 똑같다.


 야야, 이것 좀 치워 봐라.

 예, 아부지.


 저, 저 방 치우는 꼬라지만 봐도 안다. 요령이 없다. 그러니 나이 먹어도 제 형들처럼 앞가림을 못 하지.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셋째가 문을 열어준다. 저놈은 하여튼 의심이란 게 없다. 저 좋은 사람이면 염통이라도 떼다 줄 놈이다.


 안녕하세요. 119 신고하셨죠?

 예예. 밤늦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버님, 어디 아프신 데 있어요?

 없어.

 아부지, 병원 가셔야 해요.

 병원엘 왜 가.

 검사 한 번 받아보셔요. 예? 저기 거실에 소변도 보시고. 자꾸 깜빡깜빡하시잖아요.

 소변을 봐? 내가?


 소변은 무신. 방 치우다 제가 물이라도 쏟았겠지. 아부지, 제발요, 네? 성화를 하는 게 딱해서 한 번 가보긴 한다만 검사해 보나 마나 뭐 별 거 없을 거다. 갑자기 밥솥에 매달린 추가 돌아가면서 허연 연기를 뿜는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밥솥에다 쌀대신 마늘을 넣고 밥을 한 모양이다. 마늘 물이 밥솥 옆으로 막 샌다. 야야, 저게 다 뭐냐. 냄새나니까 빨리 치워라. 예, 아부지. 하이고, 대답은 잘해요.


 CT 상에는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그 봐라. 의사 선생님도 이상 없다는데 저가 뭐라고 자꾸 아픈 노인네 취급을 한다. 의사가 셋째를 저 쪽으로 데려가서 무어라 이야기를 한다. 셋째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저게 어지간하면 싫은 티를 안 내는 놈인데 웬일일까. 이야기를 마치고 오면서는 또 얼굴이 밝다. 저러니 어디 가서 호구 취급이나 당하지. 사람은 자기 의견이 확실해야 남들이 함부로 못 하는데. 당최 누굴 닮아 저 모양인지 알 수가 없다. 마누라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옆에 없으니 비교도 못한다. 그러고 보니 요샌 당신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액자에 사진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게 당신 얼굴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꼭 남의 여편네 같다.


 아부지! 아부지!


 문 두드리는 소리, 나를 부르는 아들 목소리에 정신이 든다.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뭘 하는 중이었더라? 창 밖으로 해가 한창이다. 좀 전까지 한밤중이었는데 별일이다. 병원에서 머리 검사를 받고, 택시를 잡아서 집으로 오고, 그래, 아시안게임 재방송을 보는 동안 벌써 이만큼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아부지! 아부지! 간다, 가 이놈아. 동네 사람들 다 깨우겠다. 문 좀 열어 보세요 아부지!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전자키인가 뭔가로 바꾸고 난 뒤론 문 여는 것도 일이다. 대문을 열어놔도 걱정 없던 때가 있었는데. 훔쳐갈 것도 없는 집을 뭐 한다고 꽁꽁 잠가 놓는 건지.


 아부지! 잠금장치를 옆으로 미세요!


 당최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저 놈은 말주변이 없다. 아랫도리가 서늘해서 보니 팬티만 한 장 덜렁 걸치고 있다. 웬일인지 다 젖어서 더 차갑다. 덜컹. 하며 아파트 복도에 붙은 작은 방 창문이 떨어진다. 헬맷을 쓴 젊은이가 창을 넘어 들어온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예예, 괜찮아요. 젊은이가 내 쪽으로 다가와 현관문을 연다. 못난 놈의 얼굴이 나타난다. 못난 며느리의 얼굴도 그 옆에 있다.


 애미야.

 네, 아버님.

 바지 찾아서 좀 가져다줘라. 민망하구나.

 네, 아버님.


 소방서에서 왔다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라진다. 몇 명만 남아서 혈압이랑 이것저것을 잰다. 검사받아보셔서 알겠지만 병원 가셔도 딱히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을 거예요. 소방관이 며느리에게 말한다. 간병인을 구하시거나 시설을 알아보시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며느리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여간 예전부터 저랬다. 뭔 말만 하면 울어서 속 시끄러웠던 새아가. 아버님 아버님 부르는 게 꼭 어린애가 제 아비를 찾는 것 같아서 맘이 쓰였는데, 언제 저렇게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나. 언제 저렇게 나일 먹었나.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그래도 잘 살아준 게 고맙다. 다른 형제들처럼 어디 멀리 가지 않고 노인네들이랑 가까운 데 살아줘서 고맙다. 고마운 일이 참 많은데 입 밖으로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미리 말하는 연습이라도 해 둘걸 후회가 된다. 아마도 셋째가 말주변이 없는 건 나를 닮아서다. 저놈도 제 마누라한테 고맙단 말 한마디 안 하고 살았겠지. 나처럼 후회하기 전에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세상엔 꼭 하고 살아야 하는 말들이 있다. 고맙다. 사랑한다. 그런 말은 품고만 있으면 돌처럼 굳어진다.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러다 결국 망망대해에 닻을 내린 배처럼 인생을 혼자 부유하게 만든다.


 바닥이 차다. 뭘 엎었는지 카펫 한쪽이 다 젖었다. 집구석이 엉망진창인데 하나 치우는 사람이 없다.


 여보.


 불러보지만 답이 없다. 여편네가 재깍재깍 대답을 않는 게 영 마음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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