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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Oct 15. 2023

소방관은 몇 급 공무원인가요

 모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를 본 일이 있다. 처음 봤을 땐 솔직히 웃겼다. 21세기에 사람을 15 개 등급으로 나누어 놓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등급별 분류 기준 또한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몇 개만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분류표상 1등급 남성은 서울대 출신 판사, 속칭 경판이다. 1등급 여성으로 분류되기 위해선 부모님이 장차관급 공무원, 국회의원, 혹은 지자체장이거나 10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이상은 너무 별세계의 이야기 같아서 한 5등급쯤으로 기준을 낮춰보면 남성은 메이저 의대 출신의 대학병원 의사 혹은 금융권 공기업 입사자가 해당되고, 여성은 비스타급 연예인 또는 비메이저 언론사 아나운서, 그리고 미스코리아 대회 미입상자가 여기에 속한다. 이제 욕심을 버리고 9등급 남녀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살펴보지만, 국내 20대 기업 입사자나 메이저 시중은행 혹은 국책은행 입사자란 조건이 따라붙는다. 내가 몸 담은 조직에서 일하는 남성은 15개 등급 가운데 14번째로 분류된다. 그래서 어쩌다 친한 친구들이 소방관도 공무원인데 너는 몇 급이냐 하고 물으면 농담처럼 답한다. 나는 14급 공무원이라고.


 14급 공무원의 직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일반적인 건 불 끄는 사람, 즉 방화복을 입고 화마를 상대하는 사람들이다. 국민들에게 가장 익숙한 용감하고 영웅적인 이미지의 소방관인 이들을 우린 진압대원이라 지칭한다. 두 번째는 산을 타거나 물에 뛰어드는 구조대원이다. 우리끼리는 강한 체력을 겸비하고 다양한 구조 장비를 다루는 데에 특화되어 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폼나는 소방관이라 말하곤 한다. 세 번째는 우리 구급대원이다. 동네 북, 주취자 처리반, 택시, 저승사자, 피투성이 소방관, 등등등. 몇 가지 별명으로 우릴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나서서 구급차를 타고 싶어 하는 나 같은 별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직원들은 인사 시즌마다 구급대원으로 배정이 될까 봐 두려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직원들이 구급대를 기피하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상상도 못 한 인간군상들을 상대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가장 문제다.


 구급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건 물론이요 마음까지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택시비가 아까워 집 앞까지 걸어 나와 구급차를 부르고, 술 취한 새벽마다 헤어진 애인에게 하듯 119에 전화를 건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제 나라를 떠나 시집온 외국인 노동자는 삼촌뻘의 남편에게 매일 두들겨 맞고, 우울증에 걸린 엄마는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샤워호스로 목을 맨다. 움직이지 못해 달 뒷면의 분화구처럼 등짝이 온통 욕창으로 뒤덮인 남자는 겨우 쓸 수 있는 한쪽 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선풍기를 틀어달라고 말한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런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출동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늘 염치없고 몰상식한 인간들을 욕하기 바빴다. 그런데, 수년간 구급차를 타며 깨달은 것은 이러한 가난이 결코 유별난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가난은 예상보다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었고 그 뿌리 또한 깊었다. 내가 그 일부가 되지 않은 건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운이 좋아서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선한 배우자를 만났으며, 참으로 다행스럽게 건강한 자식들을 얻었다. 말단이나마 나랏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한참 소방 조직이 몸집을 불리던 시기에 운 좋게 시험을 본 덕이었다. 여기 적은 것 중에 어느 하나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가난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구급차를 부르는 사람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몫이 되었어야 할 불행을 그들이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불행의 무게를 덜어주는 내 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가 일종의 필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어 1등급의 사람이 5등급의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이의 2,3,4 세 개의 필터를 거쳐야 하고, 구급차를 타는 15등급 바깥의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최소 14개의 필터를 거쳐야 하는 식이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가 공감능력의 지표가 된다는 주장은 하기 어렵지만,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낮은 곳의 사정을 이해하려면 큰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럽다. 가난한 사람들을 눈높이에서 볼 수 있는 낮은 자리가 좋다. 마지막 15가 아니라 14급으로 분류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등급표를 만들고 나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 분에게 감사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14급 공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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