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Oct 18. 2023

김경자 할머니

 그 할머니는 하느님도 못 막을 거예요.


 함께 출동한 구급대원의 말이었다. 경자 할머니는 우리 센터, 아니 우리 시의 구급대원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수시이용자 중 한 사람이다. 할머니가 유명한 이유는 우선 구급차를 부르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보통 하루에 한 번 구급대를 호출하고 많은 날은 두 번도 부른다. 호출하는 시간대도 문제다. 보통 취약시간이라 부르는 새벽 2시에서 5시 사이에 119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상황실의 수보요원에게 어느 날은 배가, 어느 날은 다리가, 또 어느 날은 온몸이 아프다며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말한다. 지팡이를 짚긴 해도 할머니가 거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급하지 않으면 택시를 잡으시라 말해도 소용없다. 내가 급한 환자예요. 차분한 톤으로 답한 뒤, 들고 있던 지팡이를 구급대원에게 건네고 우아하게 구급차에 오른다. 옛날 사람치곤 덩치도 좋고 키도 커서 어딘지 위풍당당한 느낌이다. 감사합니다.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할머니는 결코 품위를 잃는 법이 없다.

 경자 할머니는 서울의 유명 여대를 졸업하고 정년까지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일했다. 할머니는 자기의 화려했던 과거사를 구급차에 탈 때마다 이야기한다. 아마 역사를 전공해서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내가 돈이 없는 게 아니에요. 같은 말도 꼭 덧붙인다. 그건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할머니는 자기 명의의 멀끔한 아파트에서 거실 책장을 가득 채운 고서적들과 함께 산다. 병원 갈 때는 늘 밍크인지 뭔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밝은 갈색 코트를 걸치는데 그게 싸구려처럼 보이진 않는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해서 할머니의 도착을 알린다. 잠시 뒤, 구급차 안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던 경자 할머니 앞에 환자 분류 간호사와 원무과 직원이 나타난다. 원무과 직원이 먼저 말한다.

 할머니, 지금 미수금이 백만 원이 넘었어요.

 네. 다음에 낼게요. 내가 돈이 없는 게 아녜요.

 지난번에도 그러셨잖아요.

 낼 거예요. 내가 의지할 데도 없고 혼자라서.

 할머니, 그럼 오늘 일부만 먼저 수납하시고 진료를 보세요. 간호사가 거든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아픈 사람이 왔는데 지금 돈이 문제야! 할머니가 소리친다. 잠시 얼이 빠져있던 간호사가 정신을 가다듬고 묻는다.

 그럼, 지금 어디가 불편하세요?

 몰라. 병원 들어가면 알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넌 말하지 마!

 기품 있던 노부인은 온데간데없고 발톱을 숨기고 있던 늙은 폭군이 모습을 드러낸다. 젊은 시절에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을까. 그녀가 내 고등학생 시절 담임 선생님이었다면 내 생각에 하루가 멀다 하고 두 뺨이 부어 터졌을 것이다. 집에 갑시다. 그녀가 명령한다. 집에는 모셔다 드릴 수 없어요. 그럼 택시라도 잡아 줘요. 병원 앞에 줄지어 선 택시를 굳이 잡아달라고 말하는 이유가 궁금하지만 그냥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도로에 정차하고 있는 택시 중 하나에 다가가 응급실 앞으로 와 주십사 부탁한다. 택시기사는 친절하다. 지팡이를 쥐지 않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차에 오르는 걸 돕는다. 고마워요. 할머니가 예의 3옥타브 도(Do)의 나지막이 깔리는 음성으로 인사하며 싱긋 웃는다. 택시기사도 좋은 일을 했다는 느낌에 고무되었는지 푸근한 미소로 답한다. 그러나 택시기사의 기쁨은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가 유효기간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경자 할머니는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에게 말리(Marley)의 망령이 찾아왔을 때, 그의 곁에는 아직 사람이 남아 있었다. 바로 그가 부리는 부하 직원 밥과 외조카 프레드다. 스크루지가 개심이 가능했던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이 두 사람 덕이다. 현재의 유령이 밥의 가족이 스크루지 탓에 얼마나 고통받는가를 보여줄 수 없었다면, 크리스마스 저녁에 저 밖에 모르는 외삼촌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축배를 드는 조카의 애정을 알려줄 수 없었다면 스크루지는 아마 회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설은 해피엔딩이지만 그토록 지독한 스크루지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소설적 허구로 느껴진다. 내지는 마음 따뜻한 작가의 배려거나. 현실의 사람들은 이득이 되지 않는 한 굳이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이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경자 할머니의 미래에 스크루지와 같은 반전이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잔인한 결말처럼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잔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방관은 몇 급 공무원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