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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17. 2023

어디 가서 사랑한다고 하지 마라

  새벽 3시.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다가 퍽 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출동벨 울리기 직전에 스피커에 전기가 돌면서 나는 소리였다. 이어서 귀를 쨀 것처럼 구급출동벨이 대기실을 뒤흔들었다. 회사 들어온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데 저 소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피곤에 절은 상황실 수보요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자친구가 죽을 것 같다고 합니다. 현장확인 바랍니다.


 식겁해서 서둘러 구급차에 올랐다. 신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잖은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출동 중인 구급대원입니다. 지금 여자친구 분이랑 같이 계시나요.

 아뇨. 저는 OO시에 살아요.

 여자친구가 죽을 것 같다고 신고하신 거 맞죠?

 네, 아까 전화로 싸웠는데 죽어버린다고 했거든요.

 아, 네. 여자친구 분께 다시 전화해 보셨나요.

 제 전화를 안 받아요.

 알겠습니다.

 남자가 사는 OO시는 이곳에서 차로 2시간 거리였다. 그러니까 장거리 연애를 하는 와중에 여자친구와 전화로 다퉜는데, 연락이 되질 않아 구급차를 부른 거였다. 의외로 타지방에서 누군가의 생사 확인을 부탁하는 신고가 많다. 명절 전후로 부모님이 잘 계신가 염려되니 가서 봐달라는 전화가 가장 많고, 따로 사는 자녀가 잘 사는지 봐달라는 전화가 그다음으로 많다. 그래서 제 여자친구가 살아있는가 우리더러 보고 오란 남자의 부탁도 그러려니 했다. 많이들 그러니까.


 낡은 원룸 건물의 좁은 층계를 올라갔다. 여자는 2층에 살았다. 다들 잘 시간이라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답이 없어서 조금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현관문 너머로 잔뜩 쉰 목소리가 말했다. 119입니다. 문이 열리며 파자마 차림의 여자가 나타났다. 술에 취해서 비몽사몽인 얼굴로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친구분이 걱정된다고 신고하셨어요.

 아, 네. 괜찮아요.

 혹시 어디 아프시거나 한 데는 없죠? 묻는데, 안쪽에서 앵앵앵 하고 애 우는 소리가 났다. 없어요, 감사합니다. 여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곧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귀소 하는 길에 신고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자 친구는 무사하니 염려마시라 말했더니, 아닌데, 진짜 죽을 것 같았는데. 하고 알듯 모를듯한 말을 했다. 이어서 여자가 마음이 진정이 될 때까지만 좀 지켜봐 주시면 안 되냐고 하길래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불안하면 직접 와 보시라고 덧붙였다. 내일 일도 나가야 되고 거리도 멀고 어쩌고 장광설이 이어졌다. 점잖은 목소리가 점점 듣기 싫었다. 저흰 들어가 보겠습니다. 말하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사랑한다고 티를 내고는 싶고, 거기에 따르는 불편은 참기 싫어하는 사람들. 불편한 일이 생기면 남의 손을 빌어 해결하는 주제에 저는 도리를 다 했노라 착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어디 가서 사랑한다는 얘길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된다고, 염려된다고, 말로는 네 세상의 그림자까지 다 끌어안을 것처럼 떠벌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나 좋으려고 널 이용해 먹는 거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그 편이 훨씬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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