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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Nov 08. 2023

싸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

 부부가 같이 살다 보면 쓰잘 데 없는 일로 곧잘 싸운다. 당사자들 입장에선 서로의 불합리함에 열불이 나지만 제삼자가 본다면 심심해서 싸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유들이 다툼의 시발점이 된다. 양말을 뒤집어 놓아서 싸우고, 변기 뚜껑을 내리고 위에서 오줌을 갈기는 바람에 싸운다. 자다 깨서 보니 저만 이불을 돌돌 감고 자는 게 밉살스러워서 엉덩이를 걷어차다가 싸운다. 엊그제 아침인가는 와이프가 도시락 뭐 싸가냐고 묻길래 아직 생각 안 했는데 라고 말했고, 출근 시간 다 됐는데 어쩔 거냐고 짜증을 내길래 나도 욱해서 누가 싸달래! 하고 성질을 냈다. 정리하자면 내 점심밥을 어찌 해결해야 할까 걱정하다가 싸운 것이다. 친한 친구가 그런 이유로 아내와 싸웠다고 얘길 한다면 천하의 등신이 여기 있구나 하고 말해줬을지 모르나, 어쨌든 나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싸웠다. 사실 다툼의 밑바닥엔 보다 복잡하고 내밀한 원인이 있다는 걸 안다. 전세 만기가 다가와서 곧 이사를 해야 한다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 어쩌면 아이들 눈치가 보여 며칠 밤을 손만 잡고 잔 데서 비롯한 불만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그런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가 자존심 상해서 와이프에게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걸었다.


 비위관(코로 밥을 넘기는 줄)이 빠져서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신고를 받았다. 거동이 가능한가 물었더니 전혀 불가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현장에 도착하자 노인이라 하기엔 아직 애매한, 환갑 전후로 뵈는 아주머니가 우릴 맞았다. 그녀의 남편이 소파 아래쪽에 영 불편한 자세로 기대 있었다. 남자는 앙상한 뼈마디에 누렇고 거무죽죽한 거죽이 달라붙은 몰골을 하고 있었고, 기름기가 없어 푹 꺼진 눈두덩 안쪽으로는 세탁기 배수관에서 흘러나오는 물 마냥 희멀건 눈동자가 보였다. 남자는 식도암을 앓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아도 초기는 지나갔지 싶었다. 남자의 바지춤을 잡고 들것으로 옮기는데 너무 가벼워서 놀랐다. 거실에 붙은 아들, 딸, 손주들과 찍은 가족사진의 정중앙에 정력적이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의 남자는 자신이 코로 죽을 넘기는 몸이 되리란 상상 같은 건 평생 해 본 일 없는 듯했다.

 

 같은 날 식육 식당으로 출동을 나갔다. 한우를 파는 곳이었는데 사람이 쓰러져서 의식이 없다는 내용의 신고였다. 환자는 60대 초반의 여성이었고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다. 보호자인 남편이 먼저 자기 아내를 의자에 앉히고 식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우릴 불렀다. 그, 치매가 있어요. 조현병도 있고. 쓰러진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여자의 활력징후를 살폈다. 커프에 쉭쉭 바람이 차오르는 동안 여자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붙지도 못할 시험을 맨날 본다고 그래, 멍청한 놈. 여자의 검지손가락에 채혈침을 찔러 넣었다. 작은 핏방울이 맺히는 걸 보자 무언가 떠올랐는지 또 말했다. 저게 내 머리에 구멍을 내서 피를 빨았어. 두 번이나! 여자의 두 번이나는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현장에 아무도 없었다. 우선 말이 앞뒤가 맞질 않았고, 여자의 코 앞에서 불붙은 한우 등심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놈, 확 죽여버려야 하는데. 되뇌는 아내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밥 더 먹을 거야?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가 그녀의 앞접시에 그득했다.


 외투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섰다. 아빠 다녀올게. 식탁에서 아침밥 먹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세요! 상큼한 답이 돌아왔지만 정작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새로 산 신발이 발에 맞지 않는다고 구시렁대며 한참을 미적거렸다. 보다 못한 아내가 다가왔고,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러고 나서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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