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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Dec 09. 2023

아버지는 이어진다

 자정이었다. 아버지는 도로에 누워 있었다. 마지막 배달을 나가는 길에 사거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달려왔다. 그 차는 차선을 따라가지 않고 아버지가 서 있던 역방향으로 곧장 내달렸다. 아버지는 차와 부딪혀 날아가면서 왼쪽 발목이 부러진 것 같았다. 차는 아버지를 들이받고 곧장 뒤에 서 있던 택시의 옆구리를 쳐서 도로 연석까지 밀어버렸다. 잠시 후 아들이 도착했다. 아내도 도착했다.

 술 처먹었나 봐. 아버지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들이 말했다.

 병신 되면 어떡하지.

 아파? 아내가 말했다.

 병신 되면 어떡하지.

 아버지는 아픈 건 둘째고 다리를 못 써서 일을 못하게 될까 봐 걱정인 것 같았다. 부목을 대는 동안 벌써 붓기 시작해서 다친 쪽 발목이 반대편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아버지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내년이면 환갑이었다. 밤늦도록 배달 오토바이를 모는 일을 취미로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평생 먹고살 궁리를 하며 산 아버지였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아버지였다. 병신 되면 어떡하지. 웅얼거리며 멀찍이 현실로 나타나지도 않은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표정에서 나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입대하고 얼마 뒤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강원도 강릉으로 이사 갈 거다. 강릉은 왜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거기 유명한 한과 공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뜬금없이 웬 한과 공장. 디지털카메라의 출현으로 20년간 장사 잘 되던 사진관을 팔아 치우고 그 돈으로 대학가에다 작은 식당을 차린 게 불과 몇 개월 전이었는데 그것도 망한 모양이었다. 사진관은 시기를 잘 타서 장사가 잘 되었을 뿐이지 사실 우리 집안엔 장사 재목인 인물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나눠 준 돈을 사 남매가 장사한다고 알차게도 까먹었다. 그래서 한과 공장에 다닐 즈음 아버지의 얼굴엔 늘 그늘이 있었다. 두 차례 실패를 경험한 데서 오는 자괴감, 둘이 함께 일하지만 변변치 않은 벌이로 다가올 내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란 불안감이 아버지의 입에서 긍정의 말을 빼앗아 갔다.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가 꼭 싸움이 난 건 아마도 그래서다. 네가 그걸 할 수 있겠냐. 그건 아니다. 다시 생각해 봐라.

 안 될 거다.

 안 될 거다.

 안 될 거다.  

 겨우 두 번 넘어진 걸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자식도 자기처럼 안 될 거란 말을 주문처럼 달고 사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면서 한 번도 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단 사실을 이땐 잘 몰랐다. 공장일 이후로 아버지는 대학 전공을 살려 건축회사 현장 감독을 했고, 자기 팀을 꾸려 집을 지으러 다니기도 했고, 학교에 식재료 배달을 하고, 지금은 국유임도에서 임도관리원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깨달은 건 아버지가 쏟아질 것 같은 불안을 머리 위에 이고서 꾸역꾸역 일을 한 게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젠 내가 그러고 있다 보니 잘 알겠다.


 위험하지 않겠냐, 소방관.


 막 시험 준비를 해보려는 나에게 아버지는 또 그렇게 말했다. 첫째 딸이 걸음마를 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내 새끼를 둘러멘 불안한 나의 걸음마도 시작이었다. 그 모습은 내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아버지와 싸우지 않을 수 있었다.


 해 볼게요.


 사고가 나도, 잘 되던 장사가 망해도, 나는 나아갈 수 있다. 이젠 내 안에도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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