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공책을 펴고 뭔가 끼적이는 아이에게 물었다.
“뭐 해?”
“받아쓰기 숙제.”
“숙제가 있었어?”
“응, 틀린 거 두 번씩만 쓰면 돼.”
“몇 점인데?”
“20점.”
“20점?”
20점을 받고도 저리 태연할 수가 있나 싶어 벙찐 표정으로 아이를 보는데 아이가 고개를 들고 한 마디 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며 껄껄 웃는 애가 웃겨서 나도 따라 껄껄 웃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일전에 아내가 해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시험을 망친 날 장인어른한테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나고, 빠릿한 둘째에 비해 맞이가 배우는 게 느리고 굼뜨다며 타박을 받는 어린 시절의 아내가 그려졌다. 20점짜리 시험지를 두고 덤 앤 더머처럼 웃어대는 부녀가 아내의 눈엔 행복하기보단 불안해 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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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저녁, 잘 시간이 다 되었는데 첫째가 내 휴대전화를 들고 거실 바닥에 엎드려 열심히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장난 그만하고 이빨 닦아.” 아내가 말했지만 아이는 뭔가에 열중하느라 듣지 못했다. 나는 게임도 않고 설치한 앱도 없는데 뭘 저리 열심히 하는가 궁금했다. “일단 둬 봐요.” 아내에게 말했지만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잠시 뒤, 아이가 전화기를 가져왔다. 메모장 앱을 열어 끼적여 놓은 글이 보였다.
봄날하늘에푸른잎이돗는봄날
달콤한봄비가나를반기네봄날푸른
잎사귀에이슬이보석처럼빗나고
아름다운은빗정원봄날
맞춤법도 군데군데 틀리고 띄어쓰기는 아예 없었지만, 시험으로 치면 0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건 100점짜리 시험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시험에서 20점을 받으면 어떠랴. 삶은 20점짜리 시험지의 연속이다. 수능을 망친다. 연애에 실패한다. 대학 가서 2회 연속 학사 경고를 받는다. 취업에 실패한다. 죽도록 준비한 시험에서 떨어진다. 돈도 없는데 애부터 생겨서 결혼한다. 등등등, 등등등. 적고 보니 다 내 얘기다. 그래도 지금 멀쩡하게 잘 산다. 내 생각에 그건 20점짜리 시험지를 보고도 절망하지 않은 덕이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나도 꼭 그렇게 말하며 살았다.
돌아가셔서 더 얘길 나눌 수 없지만 장인어른이 틀렸다. 20점짜리 시험지를 보고도 웃을 수 있어야 100점짜리 인간이다. 아이의 쨍한 미소에 시험지는 재가 된다. 그 위로 봄날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