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Jul 16. 2024

가난한 마음

어제는 잔잔바리 출동만 나갔다. 아침에 팔목을 접질렸는데 같이 사는 아들 잠을 깨우긴 싫어서 119에 신고한 노모, 땅콩쿠키 먹다가 두드러기가 생긴 아가씨, 소주 1.5리터 페트병을 다 비우고 배가 너무 아프다며 신고한 아저씨, 술 한잔하고 잠들었는데 밤에 애가 열이 나서 병원에는 데려가야겠고 택시보단 구급차가 낫겠다 싶어 부른 젊은 부부,


이런 사람들을 몰염치하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내 삶은 지옥이다. 고백하자면 한때는 그랬다. 택시비가 아까워서, 편하게 병원 가고 싶어서, 술 취한 김에, (전혀 아니지만) 구급차로 가면 진료를 빨리 볼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에 119에 신고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현장에 있는 수많은 구급대원들이 이와 비슷한 마음이리라 감히 단언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이전에는 몰염치, 비매너라 부르던 것을 가난이라 부르기로 했다. 마음의 가난. 그건 물질의 가난과 마찬가지로 멀쩡했던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공격적이고, 불안하며,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마음의 가난을 치유하는 방법은 가난한 마음을 큰 마음으로 품는 것이다. 더해서 다정한 말씨, 세심하게 혈압계를 감는 손, 환자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는 태도는 치유의 효과를 높이는 기폭제가 된다. 이런 종류의 처치는 구급대원의 업무범위에는 없다. 환자와 적정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며 질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작은 온기를 보태는 데엔 도움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튼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