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Jul 22. 2024

할머니 냄새

새벽에 발이 아팠다. 통풍은 정말 더러운 병이다.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였는데 신고받고 나가다 되려 내가 쓰러질 것 같았다. 끼적이는 지금도 아프다.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아침 9시 퇴근까지 출동이 없었으면 좋겠다. 비야 나 좀 도와주라. 너 때문에 미끄러지는 차 없게 조금만 내려라.


좌우로 논을 끼고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십여 분쯤 가니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신고자는 자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쓰러진 분은 어디 계세요? 묻자, 구급차가 정차하고 있는 위치 바로 좌측 길이 꺾어지는 곳을 가리켰다. 차가 모르고 밟고 지나가기 딱 좋은 위치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꿈쩍도 않아서 처음엔 심정진 줄 알았다. 주먹의 마디 부분으로 가슴뼈를 문지르자 남자가 기겁을 하며 눈을 떴다. 그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고, 대답을 듣고는 자기가 집에서 오 킬로도 더 떨어진 동네까지 무의식 중에 걸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합니다. 말하는데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열받는 일이 있어서 열 병도 더 마셨다고 했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쓰고 있던 검은색 야구모자챙으로 자기 눈을 가려버렸다. 그냥 내가 죽어버려야 하는데.


남자를 구급차에 실었다. 반쯤 잠이 든 남자의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주소지를 보고 여기가 댁이 맞냐고 물으니 예, 예, 예, 답이 돌아왔다. 집에 거의 다 와갈 즈음 남자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어디 가는 겁니까. 댁에 가는 거지요. 선생님이 제 집을 어떻게 알아요. 주민등록증 보고 알았는데요. 이거 혹시 그런 거 아닙니까, 인신매매?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차가 멈췄고, 처치실 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운영하는 방앗간 간판이 나타났고, 그는 놀라는 동시에 안심하며 내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전자도어록이 삑삑삑삑 소릴 내며 열렸다. 한 번에 정답을 맞힌 걸 보니 어지간히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럼 저흰 들어가 보겠습니다. 말하고 돌아서려 하자 남자가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방앗간 안쪽에서 알싸한 고춧가루 냄새와 고소한 깨 냄새가 훅 끼쳤다. 뜬금없이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 몸에서 꼭 이런 냄새가 났더랬다. 2월 시푸른 하늘을 품은 함박눈의 냄새도, 할머니 방 간이화로에서 할머니 대신 타오르던 번개탄의 냄새도, 그 냄새를 전부 지우진 못했다. 나는 팔을 들어 손바닥으로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그때 쑥스러워서 못한 걸 이제야 했다.


할머니, 잘 지내요? 나는 잘 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