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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Jul 27. 2024

텃밭의 맛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엄마가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떠나면서 아버지께 매일 안부 전화를 드리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섯 번 연거푸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을 때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남자는 복도식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 뛰어내렸다. 화단 흙이 물러서 몸은 겉보기에 큰 상처가 없었다. 끈이 전부 떨어진 나무인형처럼 사지가 아무 방향으로 뒤틀려 있지만 않았다면, 동공이 완전히 풀린 눈이 산 자들은 볼 수 없는 세계를 응시하고 있지만 않았다면, 남자가 살아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흉곽이 박살 나서 풍선처럼 부푼 가슴에 의미 없는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을 즈음 누군가 다가와 떨어진 남자의 발을 주물렀다. 3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잠시 뒤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들어왔다. 답답해서 운동이라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웬일이냐며 온 김에 텃밭에서 토마토나 따 가라고 말했다. 평소엔 귀찮아서 잘 안 가져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꼭 가져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텃밭에 가까이 가니 열매가 무던히도 맺혔다. 아들 식구들 먹이려고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정성으로 기른 토마토였다. 그런 토마토가 제 때 사람 손을 못 만나서 밑에 막 떨어져 썩어가는 것도 있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얼추 익었다 싶은 건 보이는 대로 따서 바가지에 담았다. 좁은 텃밭에서 땀을 흘리고 있으려니 내가 사람인지 모기밥인지 모를 지경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버지는 바가지 가득 토마토를 따는 나와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부모와 자식이 사랑하는 모습은 그렇게 차이가 난다. 부모는 자식에게 열매를 먹이기 위해 밭 갈고, 거름 주고, 곧게 자라라고 대를 꽂아 줄기에 묶어 주며 온갖 애를 쓰지만 자식은 열매를 따 먹기만 한다. 그나마도 나처럼 귀찮다고 열매에 손도 안 대는 일이 허다하다. 아버지는 내가 바가지 가득 열매를 따기만 해도 자신의 정성이 보상받는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내 배가 잔뜩 부른 걸 두고 그게 당신에 대한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줄기가 늘어지도록 열매를 맺고도 또다시 열매를 맺고, 내가 손을 내밀어 열매를 전부 가져가길 기다리는 모양이다.


토마토 맛은 열매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단 것도, 짠 것도, 밍숭맹숭한 것도 있었다. 어설픈 모양이 꼭 아버지나 나 같았다. 언젠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날이 오면 이 맛이 그리워질 것이다. 자주 와서 가져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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