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경 Aug 31. 2024

그러자, 눈이 그쳤다

다 못 찾을 거라고 했다. 눈이 많이 내렸다. 영감님은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막걸리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돌아오니 할머니가 없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얼굴은 그때그때 달랐다. 어느 날은 자식 얼굴을, 어느 날은 남편 얼굴을, 또 어느 날은 사진도 안 남은 엄마 얼굴만 기억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기억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날은 할머니는 자기가 누군지 잘 알지 못했다. 오늘이 엄마 얼굴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길 바랐다.


집에서 멀지 않은 길에 바퀴 달린 보행기가 엎어져 있었다. 할머니 것이었다. 눈길이라 발자국이 남아있길 기대했지만 오래 내린 눈이 이미 발자국을 덮어버린 것 같았다. 하얀 우주에 외따로 떨어진 보행기를 보고 있자니 누가 체스판에서 할머니를 닮은 말만 쏙 집어서 다른 칸에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옮기기만 한 거면 다행인데 뭐에 잡아먹혀서 다시 체스판 위로 복귀할 가망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눈은 희고 매웠다. 수색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본부에서 열화상 드론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구조대원이 드론을 띄웠다. 드론이 날아간 지 30여분 만에 화면 상에 빨간 점 하나가 나타났다. 집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점은 산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조대가 들것을 가지고 앞장서고, 구급대는 제세동기를 비롯한 소생장비를 들고 뒤따랐다. 십여 분쯤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저 앞에 뭐가 보였다. 할머니였다. 다가가며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를 연거푸 외쳤다. 거의 코앞까지 와서야 누가 거기 있단 걸 알고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복숭아처럼 발갛게 홍조가 깃든 할머니 얼굴 아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개였다. 겨우내 씻질 못해서 털이 누랬다. 추워서 개가 주인의 품에 안겼는지, 주인이 개를 안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온기가 서로를 살렸다. 단순한 진리인데, 진리는 이제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땅 외엔 뿌리내릴 곳이 없는 것 같았다.


진리를 들것에 실어 산을 내려왔다. 그러자, 눈이 그쳤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보다 오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