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아프다. 피를 많이 흘린다.
경찰 공동대응 건이었다. 출동 중에 먼저 현장에 도착해 있던 경찰에게 전화 연락을 했다. 흥분한 남자가 창문을 맨손으로 깨부수는 바람에 집이 난장판이니 꼭 신발을 신고 진입하라는 이야기였다. 박살 난 유리와 엉겨 붙은 피 때문에 현장은 스릴러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더러운 걸레로 주먹을 감싸고 있는 음울한 얼굴의 남자까지 더해지니 누군가 곧 레디, 액션, 컷을 외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남자의 상처를 살폈다. 손등 위로 길게 이어진 라서레이션(열상)을 식염수로 닦아내고 젖은 거즈를 덮어 지혈했다. “어쩌다 이러셨어요.” 물으니 “몰라요. 화가 나요. 그냥 화가 나서 그랬어요.” 기저력을 묻는 나의 말에 남자는 자신의 정신병력을 짧게 소개했다.
건넛방엔 남자의 연인이 있었다. 다리 한쪽이 없었다.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를 다치게 한 일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한 번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한 번 사람을 다치게 하면 그건 그때부터 가능한 일이 된다. 내가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한 번도 손을 대지 않는 건 그걸 영영 불가능의 영역으로 남겨두기 위함이다. 여자에게도 그 한 번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남자의 정신 병동 긴급입원이 결정되었다. 절반쯤은 남자의 의지였다.
척박한 땅에서도 사랑은 뿌리를 내린다. 물이 없고 볕이 없어도 사랑은 스스로의 몸을 칼로 그어 뜨거운 피로써 목마름과 추위를 해결한다. 그래서 어디에나 사랑은 있고, 사랑은 시간보다도 오래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