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그녀

by 백경

20대 후반에 잠시 체육관 트레이너로 일했다. 꽤나 진심이어서 관련 자격증도 여럿 취득했다. 얼굴은 못생겼지만 열정적이고 친절한 트레이너, 입소문을 탔는지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PT(개인교습)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사장의 신뢰를 받아 그가 운영하던 지점 가운데 하나를 관리할 위치가 되었다. 밥 먹을 시간도 모자라 계란 프라이와 삶은 닭가슴살을 틈 날 때마다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속병이 나도 통장에 꽂히는 현금을 보고 있으면 경련하던 위장이 진정이 되었다. 열심히 벌었고, 또 열심히 썼다. 젊은 날이 영원할 것 같았다.


어느 날 여자 하나가 PT 상담을 받고 싶다며 찾아왔다. 초여름이 다 되었는데 빨강과 검정 체크무늬 긴팔 셔츠에 털실로 짠 파란색 목도리를 두른 모양이었다. 1시간에 6만 원, 일주일에 세 타임, 4주를 진행하면 72만 원이라 안내했다. 여자의 고민이 길어지는 것 같아 오늘까지 프로모션 기간이라 저렴한 가격에 등록이 가능하노라 꾀었다. 가격은 65만 원. 더해서 한 차례 체험수업까지 해주겠다고 선심 쓰듯이 말했다. 순진한 여자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곧장 체험을 하기로 했다. 체크무늬 셔츠를 벗으니 말랐지만 군살이 군데군데 붙은 몸매가 드러났다. 얼핏 보아도 생전 제대로 된 운동을 한 역사가 없는 몸이었다. 6개월에서 1년은 붙잡아 둘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기가 돌아갔다. 통장에 추가로 꽂힐 현금을 생각하니 절로 흥이 났다.


영화든 뭐든 간에 예고편이 눈길을 끌어야 하는 법이다. 여자와의 첫 수업도 그랬다. 운동과 다이어트에 관련하여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해 그럴싸한 예고편을 선보였고, 여자는 누가 보아도 만족한 얼굴로 수업을 마쳤다. 본격적인 스케줄 조정을 위해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리고 여자는 체육관 신발장에 자신의 흰색 운동화를 두고 갔다.


한 달이 지났다. 곧 올 것처럼 하던 여자는 얼굴도 비치지 않았고, 운동한 곳이 아프다고 일주일에 몇 통씩 문자를 적어 보냈다. 결제를 하고 보냈어야 하는데, 후회가 막급이었다. 우락부락한 몸매와는 다르게 은근히 매서운 데가 있는 사장이 '매니저님, 이 신발 주인은 누군데 한 달 넘게 찾아가질 않나요?' 하고 물었을 때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무슨 수를 내던가 해야 했다. 마침 체육관 설립일을 기념해서 회식이 잡혔고, 그날 하루는 저녁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자리가 파하는 대로 일찌감찌 여자를 만나 신발을 건네주기로 했다.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만취한 날이었다. 예상보다 시간도 너무 늦어버렸다. 밤 10시쯤 연락을 했는데, 놀랍게도 여자는 이미 몇 시간 전부터 밖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처럼 체크무늬 셔츠에 파란 목도리 차림으로 미지근한 밤공기 틈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그냥 신발을 손에 들려서 작별인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취기 탓인지 여자가 저 까마득한 어둠에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간단하게 뭐라도 먹자고 했다. 여자의 얼굴에서 환하게 웃음이 피어났다.

여자는 신발을 두고 떠난 날 이후로 매일 같이 체육관 앞을 지났다고 했다. '아니, 왜요?'라고 묻는 말에 여자는 사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보고 싶었노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술을 마셨지 이 여자가 마셨는가, 뭐 이리 브레이크도 없고 요령도 없이 말을 하나 하고 생각했다. 여자는 당장 개인교습을 등록할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고, 선생님을 보고 싶은데 수업하는 것 외에는 핑곗거리가 없어 월급날만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그제야 믿도 끝도 없이 아픔을 호소하는 연락이, 신발장에서 쓸쓸히 자리를 지키던 흰색 운동화가 납득이 되었다. 서투른 표현을 걷어내니 순전한 진심이 보였다.


여자의 곁을 평생 지키겠노라 다짐한 건 조금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그날 밤 마음속에 청사진 정도는 그린 것 같다. 왕자는 못 되어도 기사쯤은 되리라, 유리 구두는 못 신겨도 너의 흰색 운동화 옆에 내 신발을 함께 두리라 하고, 여자의 두 눈 가득 담긴 내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통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