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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10. 2022

아들이 죽었다.

 지령은 무심하다.


 주말 아침 들뜬 마음에 오토바이를 타다 가드레일에 부딪혀 머리뼈가 박살 나도, 일용직 노동자의 오른팔이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 끼어 재건이 불가능해져도, 손주에게 건넨 사과가 목에 걸려 두 살바기의 목숨을 잃게 만들어도, 늘 한결같다. 무심한 듯 정나미 없이 시크하게 떨어지는 게 소방서의 출동 지령이다. 아들이 죽었다, 단 여섯 글자로 정리된 그날의 출동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어머니는 현관문 밖에 서 있었다.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남은 한 손으로 집 안 구석께를 가리켰다. 나는 손이 가리키는 대로 둘둘 말려 부피가 잔뜩 커진 이부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불을 걷어냈다. 그리고,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출동한 동료 직원과 나는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쪽 말고요! 저기요! 저기 아래!


 어머니는 눈을 가렸던 손을 떼고 다시 방향을 알려준 뒤 이번에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푸 흐흐흐, 푸 흐흐흐 하고 심호흡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소리가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세탁실 용도로 쓰는 공간이었다. 입구 안쪽 윗 벽을 따라 가스배관이 하나 지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 건장한 체격의 남성 하나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입구를 등지고 서 있었다. 새끼손가락 절반 정도 굵기의 나일론 줄 하나가 남자의 턱 밑을 파고들지 않았더라면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구나 하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뒤에서 남자의 겨드랑이를 안아 올리는 동안 함께 출동한 동료가 의류 절단용 가위로 나일론 줄을 잘라내었다. 양손으로 남자의 체중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중력을 거스르려는 의지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어느덧 내겐 익숙해진 죽음의 무게였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들은 공무원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얼마 안 된, 현재는 수습 단계를 밟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우리로 치면 소방관이 정식 임용 전에 소방사 시보라는 임의의 직책을 부여받는데, 그와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고, 얼마 전엔 합격 기념으로 온 가족이 근사한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이제 갓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아들은 또래에 비해 일찍 안정적인 직장을 잡았고, 어머니는 자식을 둔 다른 친구들 앞에서 은근슬쩍 아들 자랑을 했다.



 

 애 딸린 서른셋 가장이 되어 운 좋게 소방관 시험에 합격한 나는, 사실 임용 초부터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늦은 나이긴 했지만 앞으로 20여 년은 더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았고, 어디 가서 욕 안 먹는 일이라는 점도 좋았고(주취자를 상대하면서 조금 바뀌긴 했다), 무엇보다도 고액은 아니었지만 나랏밥을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맘에 들었다.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걱정 안 하게 만드는 아들이 된 것만 같았다. 나에겐 내 자식들도 그것과 비슷한 의미다. 크게 자랑할 일을 만들지 않아도 좋고, 건강하게 제 밥벌이나 잘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함을 느낄 것 같다.


 그래서 젊은 죽음을 목도할 때면 나는 지독한 겁쟁이가 된다. 자식이  그냥 제 삶만 잘 살아주기를 기대하는 일도, 어쩌면 이 시대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겨우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나의 경제적 능력이나,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와 집사람의 미성숙한 성정이나,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국내외 정세 따위가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 내 가족의 발밑을 겨누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뒤엔 '어느 날 갑자기 부자 되는 법', '좀 어렵지만 아이의 눈높이에서 말하기', '국제 유가가 오르면 전쟁이 터진다'와 비슷한 뉘앙스의 제목이 적힌 책 몇 권을 인터넷에서 주문해서 읽기 시작한다. 돈이 아까워서 끝까지 읽긴 하지만, 서른 후반에 접어든 내 인생이 독서로 인해 급작스럽게 전환점을 맞이한다던가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늘 그렇듯 성공한 작가들의 배만 불려주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내 인생이 여전히 깨어있으려고 발버둥은 치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조금 뿌듯해진다. 책 한 권을 틈틈이 읽어내는데 보통 일주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즈음 되면 머릿속을 배회하던 젊은 넋의 얼굴도 흐릿해진다. 아무튼 독서는 유익하다.


 무엇이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는 알 도리가 없다. 피 땀 흘려 공부한 결과가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와 트러블이 있었을 수도 있고, 이전부터 그를 괴롭히던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들이 삶을 마저 사랑할 수 없었다는 것과 살아내야 할 절박하고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옆에 있다면 동생 대하듯 몇 마디 조언이라도 해 줬을 걸 하고 생각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죽음은 확실했고, 번복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저녁밥을 차려 놓으면 두 딸은 작은 짐승들처럼 식탁 의자에 오른다.  아빠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고, 밥그릇을 싹싹 비워 놓는 모습에 나는 그저 신이 난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은, 이게 내가 살아있는 이유고 반드시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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