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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Sep 07. 2022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라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척추관 협착증 수술을 받고 한 달 여간 병원 신세를 지는 중이었다. 7년을 만난 여자 친구는 내가 군에서 백일 휴가를 나왔을 때 헤어지자 말한 것과 얼추 비슷한 투로 두 번째 이별을 통보했다. 내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수술이 잘 돼서 허리 병신이 되진 않았는데, 꺽꺽 거리며 병원 침대에 누워 오열하는 내 꼬락서니는 그보다 더 병신 같았다.

나이 먹고 덩치만 불어난 아들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엄마가 한 마디 했다.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어떤 시인의 작품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이별의 아픔에 죽을 듯이 슬퍼하다 결국 노환으로 죽었다는 난센스 비슷한 시였건 걸로 기억한다.


일 년쯤 뒤에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동종 업계의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9년째 대학생 신분을 유지 중이던 젊은 시절의 나는 양심 없이 두 사람의 불행을 진심으로 바랐다(지금은 물론 그렇지 않다).

사람이 사랑이 슬퍼서 죽지 않는다는 건 그때 이후로 내겐 기정사실이 되었다. 적어도 난 죽을 생각을 못했으니까. 흔한 클리셰였다. 시간이 약이고, 다른 사랑이 약이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퍼먹으면 다음 날 내 속을 뒤집어 놓은 건 너와의 사랑이 아니라 숙취였다.



7월의 강물은 먹다 남은 국밥 정도는 될 만치 따뜻해진다. 그러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살 건의 빈도가 늘어나는데, 하늘이 구물구물 하다던가 매섭게 찬바람이 몰아칠 때 일이 터지지 않고 오히려 날이 풀려야 터진다는 사실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척 따뜻한 여름밤이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이별에 슬퍼하던 젊은 여자 하나가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다.

뭍으로 건져 올린 여자의 몸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누군가는 누르고 누군가는 숨길을 열고 누군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주사를 혈관에 찔러 넣었다. 늘 그랬듯이 온 힘을 쏟아부었고, 살려보려고 했지만 이 날은 잘 되지 않았다. 의학적인 소견으로 보아 회생이 어려운 상황인데도 나는 매번 드라마 같은 연출을 기대하게 된다. 눈을 번쩍! 하고 뜬다거나,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거나, 미동도 없던 자동 제세동기의 한 일자 심장리듬이 갑자기 펄떡펄떡 튀어 오른다거나...... 그래서 연출이 없는 현장은 안 그래도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더 쪼그라들게 만든다. 처참한 시신의 아름다움에 안타까워하고, 그 젊음을 아까워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렇게 여자는 의학적으로 완전한 사망진단을 받았다. 휴대폰 메시지로 남긴 유서는 여자가 사람도 돈도 아닌 사랑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해 주었던 위로는 거짓말인 걸로 판명이 났다. 마침 난센스 같았던 그 시도 떠올라서 열 배는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실제로는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단 걸 알게 된 뒤로, 나는 본격적으로 쫄보가 되었다. 뭣보다도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다. 예전에 아내는 처음 만나고 세 번째로 함께 식사한 자리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내가 배달 오토바이를 몰아도 당신이 좋노라고 얘기했다. 도망치듯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빈들대며 2년쯤 허송세월을 보냈지만 아내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배달이라도 나가라 보채지도 않았다. 첫 째 아이가 만으로 세 살이 되던 해, 반년 간 꽤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의 조직에 들어왔다. 그 긴 시간을 기다려준 인내심에 감사하면서도 지금쯤 바닥이 나지 않았을까, 이미 실망할 대로 실망해서 한 번만 더 헛짓거릴 하면 팽하고 돌아서는 건 아닐까 두렵다.


내가 당직을 마치는 아침 퇴근길부터 점심밥 차릴 걱정을 하는 건 바로 그래서다. 밥이라도 잘 만들면, 혹 내게 바친 아내의 어린 날이 보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기대. 세월이 우릴 집어삼켜도 당신의 맘이 없는 마음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기도 비슷한 거다.


사람은 정말 사랑 때문에 죽기도 한다.

지금은 나 역시 그럴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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