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집에 가려면 꼭 사창가 골목을 지나야 했다. 그럴 때면 가짜 보석이 알알이 붙은 요란한 속옷 차림의 아주머니들이 오빠! 소리치며 달려왔다. 머뭇거리면 주저 없이 팔짱을 끼워버리기 때문에 걸음을 서둘렀다. 사냥감을 놓친 아주머니들은 퉤, 하고 그림자 위로 침을 뱉었다.
지린내를 풍기는 담벼락을 끼고돌면 지린내를 풍기는 빌라 건물이 나타났다. 여자 친구는 거기 4층에 살았다. 오래된 에어컨을 켜면 거기서 또 지린내가 나서 에어컨은 켜지 않고 선풍기 한 대로만 여름을 버텼다. 수압이 얼마나 약한지 머리라도 한 번 감으면 비눗물이 씻기질 않아 샤워꼭지 아래서 고사를 지내야 할 판이었다. 샤워꼭지에선 뜨거운 물도, 차가운 물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돌려도 미지근한 물만 나왔다. 그때 알았다. 가난의 온도는 미지근함이란 걸.
미지근한 이불을 함께 뒤집어쓰고 지내던 어느 날 여자친구가 뭔가를 내밀었다. 두 줄짜리 임신 테스터였다. 나는 오래 준비한 멘트인 양 툭 뱉었다. “결혼하면 되지요.” 여자친구는 다른 대답, 가령 미지근한 거절을 각오했었는지 대뜸 결혼하자는 내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엊저녁엔 아내와 회 한 접시 놓고 한잔 했다. 마흔 넘어 이룬 게 없어 울적하노라 말하니 아내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룬 게 왜 없어. 안주가 이렇게 좋은데. 방바닥이 이렇게 뜨거운데.” 듣고 보니 그랬다. 집이 절절 끓도록 불을 때면서, 차가운 회에 차가운 술을 마시면서 이룬 게 없다니. 미지근함을 벗어난 우리가 새삼 대견했다. 머쓱해서 한잔 털어 넣고 당신 손을 잡았다. 세상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