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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Feb 25. 2023

망각의 기보

 말하는 법을 잊은 남자는 마치 물고기 같았다. 심해에 가라앉아 커다란 몸을 뉘이고 있는 물고기.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동자 안을 채운 것은 주변 사물을 반사한 빛의 얼개가 아닌 까마득한 어둠이었다. 인형 눈 같기도 했다. 의식 너머에 침잠해 있던 그는 왼팔을 죈 혈압계 커프가 조여오자 바닥을 헤엄치며 거칠게 저항했다. 제대로 측정이 될 리가 없었다. 혈당은 정상 범위였다.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남자의 호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난치성 뇌전증을 오래전부터 앓아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 어디예요? ” “OO기원입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 “5분이면 가요. ”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어딘지 화가 난 듯했다.


“김 OO 님, 저희 누군지 아시겠어요? “ 남자에게 재차 말을 건넸다.


“...... 누구세요? ”


“아, 이제 말씀하시네. 저희 119에요. ”


“119요? ”


“발작하면서 쓰러지셔서, 옆에 계신 분들이 신고하셨어요. ”


“제가 쓰러졌어요? ”


 남자는 당혹감과 두려움이 절반씩 섞인 눈으로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누워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파악이 되는 모양이었다. 꽃무늬 덮개를 둘러친 오래된 연탄난로, 누렇게 바랜 벽지, 줄지어선 탁자 위엔 바둑판과 바둑알 통이 비좁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중간중간 믹스커피를 먹다 남긴 종이컵에 선인장처럼 담배꽁초가 꽂혀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다 태운 연탄재와 믹스커피를 빨아올린 꽁초에서 매캐한 지린내가 났다. 남자가 쓰러진 테이블 옆에선 적게 보아도 50 중반을 넘어선 남자 여럿이 의자 팔걸이에 하나 같이 몸을 삐딱하게 걸치고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다. 남자의 신상파악이 거의 끝나갈 즈음 철제 출입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의 아내가 나타났다. 마스크를 겹겹이 쓰고도 냄새를 참을 수 없는지 미간 아래를 집게와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누른 채였다.


“이런 데 있으니 안 쓰러질 수가 있나. 세상에, 이게 다 뭐야. ” 자신의 코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아내에게 남자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마치 불장난을 하다 엄마한테 걸린 모양새였다. “이 사람이랑 바둑 두시던 분이 누구예요? ” 쏘아붙이는 듯한 그녀의 말에 한쪽 구석에 있던 남자 하나가 조용히 다가왔고, 그녀는 무어라 주어 섬길 말을 찾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자기 남편이 쓰러진 걸 누굴 탓할까. 눈을 지그시 감고 치미는 무언가를 억누른 뒤, 간신히 한마디 뱉었다. “집에 가요, 빨리. “ 병원진료를 권했지만 늘 있는 일이라며 거절했다. 여전히 할 말을 못 찾은 덩치 큰 어린애 같은 남편을 데리고, 그녀는 밤거리의 그늘 아래로 서둘러 사라졌다.


 돌아가는 길은 고요했다. 보통 동료와 잡담을 주고받으며 귀소 하는데, 출근 전에 운동한다고 힘을 빼서 그런 건지 기원에서 탁한 공기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건지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창에 반사된 얼굴이 불빛이 환하게 비추는 곳을 지날 때마다 사라지고, 어둠을 배경으로 다시 나타나고를 반복했다. 그 모습이 마치 흰 돌과 검은 돌이 만들어내는 바둑의 기보(棋譜) 같았다. 인형 눈의 남자처럼, 결국 망각으로 수렴할 내 삶의 기보. 사람은 잊히기 위해 사는 거란 확신이 들었다. 삶은 그러쥐며 발버둥 칠 게 아니라, 바둑알처럼 하나하나 내려놓으며 그림을 그리듯 살아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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