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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Feb 26. 2023

버릴 수 없는 아내

 일주일을 벼르던 대청소를 했다. 첫째의 책상이 들어 설 거실, 미니 세탁기(본래 아기 빨래용이었다)를 비롯한 안 쓰는 가전이 산처럼 쌓인 뒷 베란다, 세탁실 겸 식량창고 겸 다용도실 겸 쓰레기 창고를 겸하는 부엌 옆구리에 붙은 창고가 타겟이었다. 친한 소방서 동료이자 중고등학교 동창을 불러다 힘쓰는 일을 시키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이 친구와 16년 만에 재회하게 된 일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소방서 입사 시험 중 체력 테스트 당일에  늙어 뵈는 아저씨 하나가 내 이름을 부르며 친한 척을 하길래 혹시 선배님이세요? 하고 대답했다가, 그 늙어 뵈는 아저씨로부터 지금까지 두고두고 욕을 먹는다. 예나 지금이나 남한테 관심 없는 건 변하질 않았다고. 그리고 저가 객관적으로 나보다 액면가가 한참 낮아 뵈지 않느냐고. 지껄이지만 어불성설이다.


 스티커 사 왔냐? 친구가 물었다. 동사무소에서 폐기물 버릴 용도로 발급해 주는 스티커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당연하지.

 내가 아는 넌 이런 걸 준비하는 사람이 아닌데. 청소하다가, 어? 어! 맞다! 스티커! 이래야지.

 ......

 

 스티커를 비롯해서 100리터 종량제 봉투 1장과 여분의 75리터 봉투 2장, 잔소리꾼인 게 거슬리지만 힘 잘 쓰는 친구 찬스까지 철저하게 구비한 까닭은 사실 아내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뭘 못 버리는’ 성미 탓이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에 원룸에서 잠시 동거를 했다. 아내는 다 먹은 배달음식 용기는 깨끗하게 씻어서 보관하고, 여기저기서 가져온 종이봉투는 곱게 접어 냉장고와 벽 틈에 끼워 넣었다. 처음엔 알뜰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찬장 하나가 사각형 프랜차이즈 죽통이며 원형의 닭볶음탕 용기 따위로 가득 차고, 냉장고 옆에 종이봉투를 더 끼워 넣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찼을 때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결혼한 뒤의 어느 날, 사는 집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만큼 쌓여가는 잡동사니도 같이 덩치를 불리고 있음을 인지하고 아차 싶었다. 이건 남편인 내가 적절히 조절을 해야 하는 문제였다. 본래 나도 정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계절이 바뀌면 집안을 뒤집어 까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어쩌면 그것이 아내의 큰 그림이었는가는 알 수 없다.


 나와는 달리 본래 깔끔한 성미인 친구 덕에 청소가 배는 쉬웠다. 우리는 쓰레기는 물론이고 쓰레기다 싶은 것, 쓰레기였으면 싶은 것까지 모두 내다 버렸다. 아내의 눈치가 보이는 물건은 그녀가 안 볼 때 몰래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대뇌의 주름이 펴지고 위장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집은 수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았다. 청소를 하면서 마음이 이토록 충만해지는 경험은 실로 처음이었다. 원래 일 마친 뒤 함께 식사를 하려 했지만 친구도 자기 딸내미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집에 가는 친구 손에 저녁에 먹으려 했던 고기를 쥐어주었다. 사양하지 않아서 조금 밉상이었다.


  아내와 둘이서 남은 정리를 했다. 뒷 베란다를 청소하는 동안 지갑 케이스가 하나 나왔다. 뭐 한다고 박스도 안 버렸을까 싶어 열어보니 예전에 쓰던 지갑과 메모지에 적은 편지 두 장이 나왔다. 하나는 아내가, 하나는 첫째 딸이 적은 것이었다. 아내는 물건을 못 버리는 만큼 마음에 담은 말도 잘 못 꺼내는데, 그래서 그녀가 손수 적은 편지는 귀한 것이었다. 50자도 안 되는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딸아이의 편지에 그려진 꽃이 아내의 서툰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중에 감기에 걸린 나를 위해 아내가 생강 끓인 물을 주려고 잠시 다녀갔다. 보내기 전에 무릎 위에 앉히고 움직이지 못하게 끌어안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행복한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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