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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r 06. 2023

알사탕 오마주

(존경하는 백희나 선생님의 작품 ‘알사탕’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먼저 책을 읽으신 뒤에 보시길 권합니다.)


 오후 5시면 마음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엄마 집에서 뺏다시피 해서 들고 온 중식칼을 칼꽂이에서 꺼낸다. 묵직하고 영롱하고 왜 여태 이런 것 하나 마련하지 않았나 별 것 아닌 후회도 잠시 밀려들었다 사라진다. 새 연필과 새 노트에 새것 같은 글을 쓰는 맘이 되어 도마 위에서 대파와 오뎅을 큼직큼직하게 썰어낸다. 그러고 보니 새 칼과 세트가 되어야 할 새 도마가 없다. 요즘 유행하는 스뎅과 친환경 PP소재 양면 도마 이야기를 아내에게 슬쩍 꺼내본다. 가격은 39800 원이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갑자기 새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랐는데 무시당한 어린애처럼 맘이 상한다. 나는 셰프들이 하는 양으로 떡볶이 국물에 고춧가루를  공중에서 촤라락 한 줌 던져 넣는다. 나만의 대담한 복수다.


 3단지 시장 노점 할머니께 직접 전수받은 레시피 그대로 떡볶이를 만든다. 포인트는 미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다시다가 아니고 미원이다. 미원을 넣어야 오리지날 시장 맛이 난다. 식탁에 앉아 하나 도와줄 생각 않는 식구들이 더 맛있게 먹지 못하도록 미원을 본래의 레시피보다 절반 이상 덜어낸다. 대신 멸치액젓과 30분 간 우려낸 멸치 육수로 감칠맛을 대신한다. 가끔 혼자 집에서 만들어 먹는 미원 폭탄 떡볶이가 훨씬 맛나다. 식구들은 그 맛난 걸 평생 먹을 일이 없을 거다. 이 또한 나만의 대담한 복수다.


 중식칼과 함께 시골 엄마 집에서 가져온 직접 빚은 만두도 함께 낸다. 옥수수기름이나 콩기름에 만두가 잠기도록 튀겨내야 제맛이지만 너희들에게 그런 걸 먹여줄 생각은 없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살짝 두르고 만두가 타지 않게 연신 뒤집어 가며 구워낸다. 맛없는 군만두가 완성된다.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며 그걸 또 좋다고 바닥까지 비워내는 꼴이란. 그런다고 한 번 상한 내 기분이 좋아질 리 만무하다. “설거지 내가 할까. ” 고무장갑을 손에 끼워 넣다가 아내에게 한 대 맞는다. “가서 좀 쉬시라고요. ” 쌀쌀맞게 말하는 폼이 영 얄밉다.


 밥 먹고 나면 보드게임을 한다. TV를 안 들여놔서 저녁 시간에도 눈을 반짝이며 놀자고 조르는 애들 때문에 고역이다. 과일이 그려진 카드를 뒤집어 같은 종류의 과일이 5개가 되면 종을 쳐서 상대의 카드를 빼앗는 게임이 시작된다. 아직 손끝이 여물지 않은 애들보단 내가 훨씬 잘한다. 내 카드가 수북이 쌓이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동시에 아이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제부터는 눈치 게임이다. 마치 아슬아슬하게 5개의 과일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 아이들 발치에 쌓인 카드가 점점 많아지고, 내 카드는 줄어든다. 내 인생이 저물고 아이들 인생이 꽃 피는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되어 게임을 마무리한다.


 큰 딸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할머니가 사 주신 책상에 두 놈이 착 붙어 일기를 쓴다. 아,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일기를 적은 지 며칠 되었다. 어거지로 일기장을 꺼내어 첫째의 심정을 이해해 보자는 마음으로 왼손으로 글을 적으려니 영 죽을 맛이다. 왼손잡이인 첫째는 나의 권유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는데, 한 두 달 쓰더니 내 왼손 글씨보다 낫다. 첫째는 오늘도 저녁 식사로 뭘 먹었는지와 그 감상평이 일기장에 담겼다. 둘째는 떡볶이와 만두 그림을 그려놨다. 메뉴를 다양화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귀찮아 죽겠다.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지만 마지막 일정이 남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장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동화책 한 권을 집어 온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어림도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장가처럼 들려줬더니 한글을 뗀 뒤에도 책을 읽어줘야 잠자리에 든다. 오늘 점심 무렵에 택배로 받은 ’ 알사탕‘이다. 뭔 내용인가 싶어 읽어 내리는데 내용이 아주 가관이다. 동동이란 놈이 색색의 알사탕(생긴 것부터가 불량식품이라 맘에 들지 않았다)을 먹을 때마다 평소에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듣게 된다는 내용이다. 특히 동동이 아빠의 에피소드가 실린 부분에서 분통이 터진다. 얼마나 애가 말을 안 들으면 잔소리를 저렇게 길게도 늘어놓을까, 그 와중에 동동이 놈은 아빠 몰래 알사탕을 또 입에 물고 잠자리에 든다. 그런데 그 사탕이 아빠의 마음을 들려주는 사탕이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실패하는 첫사랑의 고백처럼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늘어지는 아빠의 마음을 좇아 동동이 놈이 다가간다.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처럼 동화 속 동동이 아빠를 향해 외친다. ‘안 돼! 멍청아! 그 말 안 듣는 꼬맹이가 널 끌어안게 두지 마! ’ 하지만 동동이는 결국 아빠를 뒤에서 끌어안아 버리고, 단 한마디 속삭임으로 긴 싸움의 승자가 된다. ‘나도...... ‘ 하, 참! ‘사랑해요, 아빠. ’도 아니고 겨우 ‘나도. ’라니! 하, 참, 기가 막혀서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데 둘째 딸의 머리가 내 왼 어깨 위로 툭 떨어진다. 첫째는 책장을 넘기지 않고 놀고 있는 나의 오른팔을 끌어안은 채 벌써 절반쯤 꿈나라로 떠났다.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두 딸에게 툭 던진다. “이제 자자. ”


 눈을 뜨니 새벽이다. 아내의 커다란 소 같은 눈과 뱁새 같은 내 눈이 마주친다. 아내는 잠이 오지 않는지 내 커다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다. 서른 초반엔 아침까지 잘 잤는데, 마흔이 다 된 우리는 이렇게 종종 새벽에 깨어 함께 나이 먹었음을 실감한다. 아내의 웃옷을 조금 들어 아랫배를 만진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게 저녁에 먹은 떡볶이 떡 같다. 막 다시 잠이 들려는 찰나, 아직 엄마 품을 찾는 둘째가 작은 방에서 안방으로 건너온다. 침대가 너무 좁다. ‘여기 원래 내 자리야. ’ 한마디 하고 싶긴 한데 그냥 말없이 거실로 나간다. 새벽볕이 한창이다. 슬슬 일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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