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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경 Mar 17. 2023

망한 서점의 비밀

 집 앞 서점이 망했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겨우 한글을 떼고, 이제 막 스스로 책 읽는 재미를 들이기 시작한 첫째에겐 참 슬픈 소식이다. 우리 집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책을 사서 읽는다. 난독증이 있는 나 때문이다. 나는 활자를 보면 줄 간격 사이사이로 해체된 단어들이 막 날아다닌다. 그래서 같은 책을 몇 번이고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눈치챘겠지만 내가 쓰는 문장이 짧은 건 그렇게 써야 그나마 두세 번 더 읽어서 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트북 화면으로 봐서 한 줄이 넘어가면 고민하지 않고 지워버린다. 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어떻게 놓을 수 있을까.


 서점은 집 근처 마트 건물 2층이었다. 하교하는 딸을 데리러 가는 김에 들러서 야간근무 대기할 때 짬짬이 읽을 책을 고를 생각이었다. 만화책이든 뭐든 보고 싶은 책을 제 맘대로 고를 수 있다는 말에 아이도 함께 왔다. 책을 고른 뒤 1층 마트에서 군것질거릴 사달라고 조를 속셈이 뻔했지만 그냥 속아주었다. 마트 출입구를 지나 2층 서점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랐다. 못 보던 입간판이 하나 있었다.


 점포정리

 3월 31일까지 영업합니다


 어릴 적에 영문판으로 재밌게 읽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을 집었다. 점점 남의 나라 말에 애착을 가질 형편이 못 되어서 영어를 잊음과 동시에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사라진 책이었다. 시골집 다락방 구석 어디에 짱박혀 있을 것 같긴 한데 당장 보고 싶어서 골랐다. 가격은 8000원. 지난 며칠간 마트에 들를 때마다 손을 떨며 소주병을 집어 들지 않았던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는 핑계고 가격이 싸서 골랐다. 첫째가 고른 과학만화는 14000원으로 내 책의 거의 두 배 가격이었다.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못된 부모의 상상 한 번으로 쿨하게 지갑을 열었다. 계산대로 가서 고른 책들을 내려놓는데, 딸아이가 눈치 없게 물었다.


 아빠, 근데 점포정리가 뭐야?

 우리 저 쪽 가서 책 한 권 더 골라오자.


 민망한 마음에 고른 책은 넛셸(Nutshell)이었다. 햄릿의 가장 파격적인 재해석이라는 문구에 끌렸다는 거짓말을 하고 싶어도 햄릿을 읽어보지 않았다. 검정과 핑크가 섞인 표지가 정말 예뻤다. 책 표지에 감탄하고 뒷면에 적힌 가격에 또 한 번 감탄하고 있을 때 문득 딸아이가 질문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점포정리는 서점 문을 닫는다는 얘기야.

 그럼, 망한 거야?

 망했지.

 왜?


 며칠 재밌게 읽고 있는 김에 홀든 콜필드 식으로 대답을 하자면, “망한 이유야 빤하지. 일단 이름이 문제야. OO 문고 라니, 지명이나 고유명사 옆에 그딴 걸 붙일 수 있는 건 메이저 기업들 뿐이야. 삼성 반도체, 롯데 제과, 현대 자동차, 빠리 바게뜨 정도 되지 않으면 안 돼. 무슨 자신감으로 ‘문고’ 같은 걸 붙인 거야. 시내에 큰 서점 하나 있는 거 알지? 아니 이제 빵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거기서 만난 여자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엄밀히 말하면 육체적으로 친밀한 그런 관계는 아니고 좀 더 내면 차원에서 가까운 사이였지. 같은 독서모임에 있었거든. 내가 책을 잘 알아서 종종 나한테 추천해 주십사 서점에 함께 가자고 말했어. 더운 날이면 얇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색이 진한 속옷을 입어서 무슨 투시경이라도 쓴 기분이었어. 정말이지 쳐다볼 수가 없었어. 서점에 온 남자들은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지만, 웃기는 건 그 자세 그대로 눈을 올려 떠서 비치는 속옷을 훔쳐보려다 보니 하나같이 이마빡에 나무껍질처럼 주름이 졌다는 거야. 그야말로 주름의 강이 흘렀지. 그 여자가 내가 골라 준 책을 사는 일은 없었어. 주로 ‘화이트 퍼플 비치의 노을을 거닐며’처럼 제목이 말 끝을 흐리는 책을 골랐지. 젠장. 그건 정말 젠장이었어. 젠장인 책을 골라서 커피 맛도 젠장인 카페에 가면 그녀는 책 옆에 커피잔을 두고 사진을 찍었어. 그것도 둘이 꼭 ’함께‘ 나오는 사진으로. 그럼 그녀의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서 춤추기 시작했지. 좋아요 세례가 시작된 거야.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20만인가 50만인가 그럴걸? 이쯤 해서 한 번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욕을 덜 먹을 것 같은데, 나는 이 여자가 속물이라던가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냐. 나도 인스타그램을 해서 알지만 사람들은 좋아요에 인색하거든. 내가 빌어먹을 물구나무까지 서서 사진을 찍어 올려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 말하자면 절실하게 관심받고 싶은 건 오히려 나지, 그녀가 아니야. 그 여자는 물구나무는 서지 않았어.

 아무튼 어느 날 방금 말한 서점이 리모델링을 해서 또 그 여자와 함께할 기회가 생겼어. 누군가 서점 안에 카페를 열고 빵을 구워 판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낸 거야. 난 정말 해마(sea horese)처럼 좋아했지. 오픈 기념으로 서점에서 유명 작가의 사인회도 열렸는데, 알지? 3년 만에 50억인가 100억인가 벌기였나 아마 그 비슷한 제목이었을걸. 일부러 어린왕자처럼 파마를 한 것 같은 회색 곱슬머리에 나는 부드러운 남자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큰 코를 달고 있었어. 얼마나 코가 큰 지 거짓말 안 보태고 내 코의 다섯 배는 됐을 거야. 이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치가 나와 그녀가 앉은 테이블에 자기가 직접 쓴 책과 갖구운 크라상 한 접시를 내려놓으며 ‘실례’라고 말했기 때문이지. 웃기지 않아? ‘실례’ 라니. 그걸 또 코웃음으로 받아치는 나의 그녀는 더더욱 빛이 났어. 그때부터는 나 홀로 그야말로 다른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었지. 작가는 작가더라고. 글을 쓰지 않고 말빨로만 조졌어도 10억은 우습게 벌었을 거야.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 자식이 노란 원피스 안쪽을 점점 더 대담하게 쳐다보는 동안 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놈의 100평쯤 될 법한 콧구멍 속의 코털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어. 그중에 몇 개는 유독 긴 것들도 있었어. 철수세미같이 더러운 자식이었어. 작가도 망하고 그녀와 작가를 만나게 해 준 서점과 빵집의 잡탕도 망하라고 기도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오히려 잘 됐지. 빵 팔기 전보다 오십 배는 매출이 늘었을 걸. 그래서 요점은 이 서점이 빵을 팔지 않기 때문에 망했다는 거야. 빵 사이에 양심도 같이 끼워 팔면서 ‘책을 읽으면 인생이 바뀝니다!’라고 열나게 헛소리까지 보탰어야 하는 건데. “ 정도로 표현이 될 것 같다.


 37400 원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장님의 얼굴은 덤덤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 3편에 나온 예수의 성배를 지키는 늙은 기사를 떠올리게 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 빠진 놋쇠 잔. 문자는 SNS처럼 반짝이지 않고 그래서 더 까마득한 것 같지만, 생각을 멈춘 두뇌에 불을 지피고 방황하는 영혼을 삶의 내밀한 차원으로 떠밀어 버린다. 그런 수 천권의 비밀로만 가득해서, 서점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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