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가오는 순간
가끔은 다가오는 마음을 모른 척해야만 할 때가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끝내 넘길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 말이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며,
저녁에 시간을 비워줄 수 있는지 네가 물었던 그날은
유난히도 별이 잘 보이는 맑은 여름날이었다.
“오빠 주위 사람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하천의 물소리에 스며들듯 자연스레 속삭이는 네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스쳐갔다.
“누군데? 잘됐다, 최대한 도와줄게”
네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별나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너라면,
어떤 사람에게든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네가 상대가 누구인지 말하기 머뭇거리는 동안
나는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고민했고,
우리의 공백을 상쾌한 여름 바람이 계속해서 메우고 있었다.
좁아지는 하천길을 따라
평소보다 미묘하게 좁아지는 거리.
나는 그 좁혀지는 거리를 눈치채지 않기로 한 채
너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막힐 때마다
사소한 사건들이 불쑥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서로의 밝은 미소로 맞이했던 첫인사,
진지한 주제로 밤을 지새웠던 가을 새벽,
스스럼없이 장난치며 웃어넘겼던 하루하루들.
연애 중이던 너는, 늘 편한 동생처럼 느껴졌다.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그저 유유히 지나간 시절들로 남았을 뿐,
이성으로 생각할 겨를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오랜 침묵 속에 걷는 동안
크고 작은 조각들이 내 눈앞에서 겹쳐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왜인지 우리는 자주 마주쳤고,
너는 '좋아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 의미를 아무렇지 않게 지워갔었다.
그리고 지워버린 조각들이 모여 거대한 작품이 되고 나서야
무심코 지나친 순간들이 다시 비춰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그 순간들이 내게 무언가 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우리의 시간이
잠깐의 화려함으로 흩어지고 사라질 폭죽보다는,
조용히 흔들리며 오래 빛나는 촛불이길 바랬다.
집으로 향할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너의 침묵이 두려웠다.
오늘을 놓치면 다시는 하지 못할 이야기가 네 입가에서 맴도는 듯했다.
하지만 여름의 짧은 밤은 너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마침내 우리에게 아침을 데려왔다.
“조심히 들어가”
네 자취방 앞에서 한 마디와 함께 돌아섰다.
이번만 눈치채지 못한 척 넘어간다면
먼 훗날 맥주 한 캔과 함께 그런 날도 있었다며 돌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네 침묵은 촛불처럼 따스한 고요가 아니라
화려한 폭죽을 숨긴 도화선이었다.
내가 가장 방심한 순간,
너는 짧은 한 문장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 사람, 오빠예요”